오이카와는 붉은 색의 음료를 쭉쭉 빨며 중얼거렸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가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상대는 다름아닌 카게야마였다. 카게야마는 그의 이야기를 빤히 듣고 있었다.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매체는 진짜 거짓말이고, 특히 햇빛, 그리고 신체랑 어쩌구 하는거 다 믿지 마라. 카게야마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니까 그런 거, 사실 그냥 피 냄새를 맡으면 충동을 느끼는 거야, 먹고 싶은. 오이카와는 계속 중얼거리 듯 설명했다. 저가 왜 이런 걸 설명하고 있어야하는 지 꽤나 못마땅한 듯 했지만, 그걸 듣는 카게야마의 표정은 꽤나 밝았다. 그러니까... 피를 먹고 살아야하긴 하는데, 딱히 그것 빼면 다른 건 없다고. 애초에 그냥 인간 신체라... 눈 돌아가도 엄청 위험할 건 없고. 오이카와는 대충 그렇게 설명을 마쳤다. 곧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얘한테 들키다니 운도 없지. 라고 오이카와가 생각하고 있을 때에, 카게야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다, 미소였다. 오이카와는 그런 그를 보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왜 웃어, 토비오쨩. 그렇게 퉁명스럽게 뱉어낸 한마디에 카게야마는 기쁜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상이, 저에게만 그런 비밀을 얘기해 주신 거잖아요."
오이카와의 눈이 조금 커지고,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고마울지도. 비밀을 발설하진 않겠다는 거니까. 하아, 진짜 내가 왜 이러고 있는거야, 토비오쨩 앞에서 이러는 거 굉장히 기분 나빠. 저는 좋습니다. 닥쳐, 토비오쨩.
그렇게 이어간 대화 속에서, 무언가 불길함을 느꼈어야하는 것은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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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것은 카게야마가 피를 흘렸기 때문이었다. 커터칼에 베인 것인지, 대체 어떻게 베인 것인지 종아리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이카와는 그 향을 맡자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고, 결국 설명을 필요로 하는 상황까지 놓인 것이었다.
거참, 토비오는 왜 피를 흘려서는....
오이카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들키고 싶지 않던 사람에게 들켜버린 비밀은 마치 치부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괜찮겠지, 괜찮겠지. 이제는 걔도 나 때문에 조심할거야. 그렇게 생각해버리고는 이불 속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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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야마 토비오는 나쁜 버릇이 하나 있었다. 이따금 카게야마는 칼의 감촉을 느껴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고는 했다. 칼, 그 칼의 범위는 꽤나 넓었다. 커터칼, 식칼, 과도, 그리고 여러가지의. 그리고는 피를 보고는 했다. 상처가 아예 남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핏방울이 살짝 나오는 그 순간만 보면 자신의 피부에 하던 칼질을 멈추었기에 상처는 곧 아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버릇의 근원은 꽤나 삶을 따라 올라가야만 나왔다. 아버지의 학대로 지쳐있던 어머니는 카게야마 때문에 어쩌지도 못하고 있었고, 카게야마는 아버지에게는 철저히 무시당하며 살아갔다. 그리고 어느날 카게야마는 피를 보았다. 어머니의 피였다. 진득한 피가 어머니의 손목에서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엄마. 엄마?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그 목소리가 닿지 않더라. 아버지는 그런 소식을 뒤늦게야 듣고 달려왔다. 이미 많은 이들이 와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들 앞에서 줄줄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표현했더랬다. 카게야마는 그 순간, 아, 그러면 사랑 받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자해가 습관이 되어버려서. 카게야마는 피를 보아야만 자신이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는 것 같아서,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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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오쨩, 너 왜 또 피를..."
피 냄새가 끼쳐 저도 모르게 따라온 부실 안에서 카게야마는 커터칼로 저의 쇄골 쪽을 베어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카게야마는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한숨을 쉬는 것 같기도 했다.
"...너 내가 어떤 지 잘 알잖아. 왜그러는데."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카게야마는 사과했다. 그리고 오이카와도 제 할일을 찾아 자리를 떴다.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안 하겠지,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한 게 문제였을까. 카게야마는 그리고도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피냄새를 따라 온 오이카와의 모습을 보는 카게야마는 어쩌면, 기뻐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이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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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상. 좋아해요."
카게야마는 어느날 문득 그렇게 고백했다. 평소보다 진한 피냄새를 쫓아 가본 곳에는 역시나 카게야마가 서있었고, 토비오 너 진짜, 하며 다시 돌아가려 하던 오이카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이카와는 발걸음을 계속 떼었다. 잠시 멈추었지만 평소처럼, 평소 일어나던 일밖에 일어나지 않은 상태인 것처럼 걸어갔다. 카게야마는 그런 오이카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흘리고 있는 붉은 피를 보며.
그리고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절망이 어느정도 담겨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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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토오루는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며 전화가 뚝 끊겨서 그를 급히 달려오게 만든 카게야마는 멀쩡하게 있었고, 그 외에 어떤 위협도 없어보였다. 장난? 토비오가? 오이카와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게야마를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 때,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상, 제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고백? 오이카와는 그렇게 묻는 카게야마에게서 그것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 고백에는 어떠한 답도 하지 않았었는데. 그 답이 그렇게 듣고 싶었던 것일까. 오이카와는 입을 뗐지만, 첫 단어를 만들기 전에 카게야마가 말을 끊었다.
"딱히 무언가 기대를 하진 않아요. 그럴 거라고 생각하니까. 저를 누군가가 사랑할 리 없잖아요."
...그렇지만 오이카와상에게는 사랑받고 싶었는데.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갈색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그 표정이 어디선가 결연한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살짝 픽, 하고 웃음소리를 내었다. 오이카와상, 예전에 그러셨죠. 충동에 휩싸이게 된다고. 피 냄새를 맡으면. 그리고 카게야마는 칼을 들었다.
"이렇게라도 하면, 저라는 사람에 사랑을 느낄 정도로 강한 충동에 빠지실까요."
날카로운 단도였다. 대체 그것을 어디서 구한 거냐고, 하지 말라고, 오이카와는 그 질문들 중 어떤 것도 묻지 못했다. 묻고 말려야하기에 말할 것이 많았는데도 오이카와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피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코를 막고 입을 막는 데에 급급했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손목을 깊게 그었다. 피는 멎을 줄 몰랐다. 그렇지만 카게야마는 웃고 있었다. 처음으로 느끼는 강렬한 고통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딱 하나.
오이카와상, 저를 사랑해주세요.
그런 눈으로, 입을 막고 상대에게 느끼는 충동을 견딜 수 없어하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이미 붉은 눈을 하고, 참으려고 애쓰는 듯한 울어버릴 것만 같은 눈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이 자신을 간절히 바라보는 것 같아서 카게야마는 기뻤다. 정말로 기뻤다.
오이카와가 마지막으로 본 카게야마의 모습은, 기쁜 웃음이 담긴 표정으로 피를 가득 흘리는 검은 머리의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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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비쳤다. 오이카와는 눈을 떴다. 눈부신 햇빛이 그의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겨우겨우 일으킨 몸, 햇빛에 익숙해져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된 눈, 껄끄러운 촉감이 느껴지는 눈, 그리고, 제 기능을 찾은 코가 느끼고 있는 피냄새. 오이카와는 순간 코를 막고 눈을 감았다. 향과 함께, 기억이 쏟아져들어왔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성조차 모르는 사람. 그저 살아가는 나의 삶 속에서 너란 존재는 꿈이었고 목표였노라, 고 오이카와는 중얼거렸다.
꿈? 꿈일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꿈이 맞을까. 그의 머릿 속에 든 것이 진짜로 '자신'의 것이 맞을까. 그렇다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오이카와는 그 '꿈'을 계속하여 꾸던 어느날 아침,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이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아, 아름다운 사람.
오이카와는, 꿈 속에서 나타나는 검은 머리의 소년을 사랑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던 꿈일까. 오이카와가 얻는 암흑의 시간 속에서 시작된 꿈이었다. 그것은 선명하기만 하며 암흑의 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전혀 믿을 수 없었다.
꿈은 처음에 자신과 소년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었다. 둘은 꼭 붙어다니는 친한 형동생의 관계쯤 되었을까. 그리고 둘의 복장은 아주 옛날, 자신이 읽었던 고전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둘은 자라났다. 자라나고 둘다 그나름의 꽃을 피워냈다.
그리고 오이와는, 자신을 향해 꼭 포옹하는 토비오의 꿈을 꾸었다. 토비오, 나는 너를.
그러나 그것은, 꿈이었다. 허상이었다. 실제가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따금 오이카와는 꿈에 몰입하다가도 어느순간 현실 세계의 인격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 허상 속 소년을 향해 뛰는 심장이 진정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곧 절망에 빠져버렸다. 그런 인격의 상태로는 그런 희망차고 숨쉬는 꿈을 부지할 수 없어, 오이카와는 첫 눈물방울을 흘리는 순간 아침햇살을 맞이했다.
아아, 또 아침을 맞이해버렸구나.
오이카와는 휴일인데도 이렇게 일찍 눈을 떠버린 자신을 원망했다. 소년이 자신을 향해 포옹해 왔는데, 나는 어째서 깨어나버린 건가. 그러나 다시 잠을 청한다 하더라도 꿈은 꿀 수 없을 것임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오이카와는 자리를 털고 이불을 개었다. 바야흐로 하루의 시작이었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
어느 과목이었지, 지루해하며 졸던 오이카와는 그 대목에서 눈을 바로 떴다. ...아. 그리고는 하나의 감탄사를 내뱉었지. 오이카와는 더 이상 졸지 못했다.
그 소년과의 과거 이야기가, 옛날에 들어본 이야기 중 하나일까. 아니면 사실 자신이 꿈꾸는 이상형이 사실은 검은 머리의 살짝 날카로운 눈매의 짙푸른 눈동자의 남자였던가. 음, 그런 꿈을 내가 갖고 있던 것일까. 오이카와는 간만에 진지한 고민을 했다.
그래, 이 꿈은 내가 꾸고 싶은 판타지 로맨스 영화쯤 되는 건가보다, 내 뇌는 주인말을 잘 들어서 주인의 취향을 완벽히 파악하고 밤마다 상영해주나보지. 그러니까, 현실 세계에서 영향을 주는 건 지양하자.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이상형일 뿐이라고, 이따금 로맨스 영화를 보며 떠는 것과 같은 이치일 뿐이라고.
그렇게, 오이카와가 다짐한 다음날의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꿈 속의 소년과 똑 닮은 남자를 만났다. 아니, 스쳐지나갔다. 순간의 일이었다. 뒤늦게 눈이 커져 쫓아가보았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그렇지만, 분명 토비오였어.'
오이카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이카와 인생의 '꿈'을, 작은 편린이나마 붙잡은 순간이었다.
낙원. 낙원이었다. 그곳은 우리의 낙원. 이제 나는 남아있고, 너는 떠났지. 그리고 다시 우리는 만났어. 낙원의 밖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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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가 운다. 피비린내가 진하다. 그 냄새는 너무 역했다. 그러나 누구도 코를 막지 않았다. 지금 냄새 따위에 무너졌다가는, 목이 날아가 버리리라. 그래,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전장은 누구도 봐주지 않는다. 모두 피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려 하는 곳.
"..기억해요?"
"응, 당연히."
그리고 그들이 있었다. 오이카와는, 미소 지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미소 짓지 않았다. 둘이 서로에게 겨눈 검이 은빛으로 빛났다. 눈부신 날이다. 시체를 파먹으려는 까마귀들이 이따금 해를 가리는 것만 빼면.
둘의 검이,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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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하렴, 이쪽은 오이카와 토오루. 너보다 나이가 2살 많지만, 그래도 또래 아이니까 친하게 지내렴, 토비오.”
갈색머리, 갈색 눈의 아름다운 소년의 눈이 깜빡거렸다. 황비는 어색해 보이는 두 아이의 손을 이어주었다. 둘의 손이 닿았다. 검은 머리, 푸른 눈의 소년이었다.
“토비오..?”
“카게야마, 토비오.”
카게야마는 웃었다. 외동이었던 황자에게는 무척이나 외롭기만 하던 황궁이었다. 그랬기에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나이의 오이카와에게 잘 짓지 않던 미소를 지어보였던 것이다.
“이제 친하게 지내렴.”
카게야마의 어머니는 그렇게 속삭였다. 그렇지만 둘의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황비의 속삭임 같은 것은 사실 의미가 없었다. 둘은 직감했던 것이다. 그 뒤에 이어질 자신들의 이야기를.
-
“여기 생각보다 심심하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침대에 누워 몸을 쭉 폈다. 하도 돌아다니면서 놀았는데, 지치지도 않은 걸까. 카게야마는 그런 그를 가만히 보여 피식, 웃었다.
“토비오, 너만 아는 그런 거 없어?”
“으음, 그러면 비밀정원, 가볼래요?”
“그런 곳이 있어?”
카게야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위해 꾸며놓은 곳이었다. 그랬기에 꽤나 비밀스러우면서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카게야마는 그렇지만 딱히 그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혼자 그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꽤나 무료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와, 여기 무척 좋다!”
이제부터는 아닐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정원의 상쾌한 공기를 느꼈다.
-
“오이카와씨?”
“근데, 토비오, 너는 왜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거야?”
오이카와는 황궁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제국에서 제일 유력한 가문인 오이카와 가문의 차남, 오이카와 토오루. 그리고 카게야마 토비오는, 황제의 적장자이자 유일한 자식이었다. 그러나 그 둘은 첫 만남 이후, 서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유일한 친구라고 해야 할까.
“그냥, 그래도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시니까요.”
카게야마는 그렇게 웃으며 답했다. 오이카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친구 같은 게 아니라고. 친구는 무슨. 그리고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온기가 따뜻했다.
-
“황태자 전하.”
“그렇게 부르지 말래도요.”
카게야마는 책봉식을 받은 날 오이카와에게 안겨 그렇게 속삭였다. 장난스레 자신에게 존칭을 쓰는 오이카와가 괜스레 얄미웠다. 이제 멀어지면 어쩌지. 카게야마는 그런 걱정도 했다. 황태자비 이야기도 들려오고. 아, 어쩌지.
그렇지만 오이카와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다른 걱정이었다. 요즘 따라 자신의 가문의 움직임이 꽤나 수상했다. 오이카와의 가문은 꽤 크고 힘이 세었다. 아직 황실에는 넘보지는 못하지만, 어쩌면. 오이카와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곧 우리의 일상이, 깨져버릴지도 몰라, 토비오. 오이카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카게야마를 품에서 떼어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
황성에 불이 피어올랐다. 복도가 피로 물들었다. 모두가 황태자를 찾고 있었다. 황비와 황제의 목은 이미 버려져 굴러다녔고, 모두가 어딘가에 숨어 있을 황태자를 찾아 칼을 들었다. 그리고 오이카와, 아니 토오루가 있었다.
“....도망쳐. 토비오!“
그럴 순 없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내가 이곳을 지켜내야 한다고 부르짖는 카게야마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가야해, 너는 살아야해. 오이카와는 그렇게 소리쳤다. 머지않아 들킬지도 몰라. 오이카와의 눈이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부디 살아달라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도망쳤다.
황성은 붉게 타올랐고, 근처의 숲은 재가 되었다. 오이카와는 그 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우리의 낙원이, 타올라버렸어. 토비오.
-
그리고 살아남은 황태자는, 오이카와의 가문이 꽂은 새 깃발을 태워버리러 다시 황성으로 돌아왔다. 장성한 황태자는 칼을 들고 군사를 이끌고, 백마를 몰았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황성에 있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오이카와는 칼을 잡기로 했다. 그리고 흑마를 골랐다. 너를 볼 시간이야, 오이카와는 타버린 정원을 생각했다. 그리고 불타오르던 황성을 생각했다. 그리고, 카게야마를 생각했다.
말이 울었다. 오이카와는 채찍을 휘둘렀다.
-
그리고 카게야마의 검 날이, 오이카와의 심장을 찔렀다. 검이 오이카와의 피로 잔뜩 적셔졌다. 카게야마는 보지 않으려했으나, 그 촉감은 이미 그의 손으로 전해져들어왔다.
“안녕.”
오이카와는 마지막으로 그 말을 남겼다. 아, 나의 낙원. 카게야마는 그런 오이카와를 힐끗 바라보고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카게야마는 말에 올랐다. 희디 흰 백마였다. 카게야마는 이를 악물었다. 백마가 울었다. 그리고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
아, 너가 멀다.
오이카와는 손을 뻗었다. 잡히지 않았다. 잡히지 않네... 잡히지 않아. 오이카와는 시야가 점점 희뿌예지는 것을 느꼈다. 말발굽 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을 즈음, 오이카와의 눈은 더이상 감기지도, 뜨이지도 않았다.
그저, 너가 떠난 자리만을.
-
사실 말인데, 네가 떠난 이곳은 전혀 낙원이 아니었어. 내가 그곳을 낙원이라고 불렀던 까닭은 그저, 네가 존재했기 때문에.
져가는 석양이 체육관에 스몄다. 시라부는 공을 양손으로 받치다가 한 손을 빼고 들어 쥐었다가 다시 펴보았다. 이 손이 어떤 손이던가. 나의 빛나는 에이스에게 공을 올리는 손이었다. 봐, 내 에이스!를 속으로 외치며 코트 위에서 나의 에이스에게 토스를 올릴 수 있다는 그 사실은, 시라부에게 큰 자부심이었다. 당신이 빛나기를. 그것은 시라부의 가슴 속을 언제나 충만하게 해주는 사실이었다. 시라부는 자신이 그에게 토스를 올리게 된 그날, 그 순간부터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는 했었다. 그렇지만 오늘따라, 그럴 수가 없었다. 시라부는 손을 내렸다. 그와 함께 공이 체육관 바닥에 툭, 떨어져내렸다.
음료라도 마실까, 하고 나온 길에 보인 것은 익숙하고도 우직한 뒷모습. 시라부는 그 뒷모습을 우시지마 상이다, 하는 마음으로 반갑게 달려가려 하였으나,
“너는 길을 잘못 들었다, 오이카와.”
....오이카와, 토오루. 시라부는 급히 몸을 돌려서, 둘 중 누구도 자신을 보지 못했기만을 바랐다. 시라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시라부에게는 야속하게도, 우시지마의 시선은 언제나 그를 향하고 있었다. 나로는 안돼는 걸까. 내가 어떤 생각으로 그에게 토스를 올리는데, 그래도 안되는 것일까. 물론 시라부는 오이카와가 우수하디 우수한 세터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왜인지,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 울컥하는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 건가.
그 생각만이 시라부의 머릿속에 빙빙 맴돌았다. 시라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경기 중이 아니라 자신의 무너진 멘탈이 시합의 승패를 가른다거나 하는 끔찍한 일은 없어 다행이라고, 시라부는 생각했다. 지금 이 상태라면 최악, 최악일 것이다. 정말로. 시라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만 같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거란 말인가, 지워버리고 싶다. 시라부는 그 질척거리는 생각의 늪에 빠져 어지러웠다.
마지막 마무리 연습이었다. 보통 이 무렵에는 가볍게 몸을 풀고 오늘따라 되지 않았던 것들을 점검해보고, 부원들끼리 가볍게 이야기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꽤나 여유롭고 편안한 일과라고 할 수 있었다. 지친 몸을 그저 눕혀 쉬이는 것보다 이 쪽이 더 좋다고 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세미는 굴러온 공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올렸다. 시라부가 놓친 공이다. 시라부는 보통 이 일과 중이면 세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토스, 점검, 그리고는 둘만의 대화. 세미는 꽤나 그것이 고착화된 일과라고 여겼는데, 오늘만큼은 아니었던 것이다. 시라부는 저기 멀리서 혼자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미는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기지 않았다. 그러면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라부의 표정은 꽤나 어두워보여서, 세미는 섣불리 무슨 일이냐고 묻기 망설여졌다. 그렇지만 영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는 걸까. 세미는 주운 공을 들어, 시라부에게 던졌다. 시라부가 그를 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잠깐, 이었다. 세미는 잠깐의 스쳐지나간 시선을 그저 붙잡고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따금 나는, 너가 조금은 나에게 털어놔줬으면 좋겠어, 시라부. 세미는 들리지 않을 말을 속삭였다. 그것은, 연인에게 하는 속삭임이었다. 석양이 타오르고 있었다. 세미는 창밖을 힐끗 보았다. 마지막 불꽃이다. 곧 해가 질 것이다. 그리고 부실의 문이 닫히고, 체육관의 문이 닫히고- 너의 눈도 감기겠지. 그전에 세미는, 시라부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세미는 공을 띄웠다. 공이 날아올랐다.
석양은 짧은 순간의 불빛. 이미 체육관을 채우는 빛 중에 햇빛은 없었다. 시라부는 부실에서 대충 정리하고 나온 뒤에, 무언가 허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무엇을 챙기려 했더라, 뭔가 오늘따라 허전한 게 있는데. 시라부는 자신이 상태가 안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아, 그냥 가자. 그렇게 숨을 뱉어낸 순간이었다. 누군가 시라부의 팔목을 붙잡았다. 시라부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세미상."
세미, 그가 시라부를 보고 있었다. 나 좀 보자, 하고 시라부는 그 손길에 끌려가듯 방금 막 나온 부실 안으로 들어가야했다. 시라부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세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화난 게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으나, 곧 세미의 그 눈과 자신의 눈이 마주치자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저 눈 안에 서린 것은, 걱정이었다. 시라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내려 숙였다.
"무슨 일 있어? 애인한테도 얘기 안해줄건 아니지?"
장난스레 웃는 듯한 그런 말에는,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말해보라는 다정한 뜻이 섞여있었으리라. 그 뜻조차도 너무 상냥하여, 시라부는 어떻게 말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아뇨, 그냥- 시라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손이 눈이 들어왔다. 세미의 손. 그 손은 오늘 스쳐지나가듯 보았던 타팀의 세터처럼, 자유자재로 스파이커들을 활용할 수 있는 손이었다. 자신의 손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주려던 시라부는,
"지금... 울어?"
세미가 물어오자 자신의 눈가에 눈물이 잔뜩 고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부름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든 시라부, 그리고 시라부를 바라보던 세미의 눈이 마주쳤다. 시라부는 좀전까지 하던 생각에서 좀체 자신을 헤어나오게 할 수가 없었다. 다정한 선배, 그리고 나보다도 사실 더 실력 자체는 뛰어나다고들, 다른 많은 이들이 그랬었는데.시라부는 우울의 극에 닿아 있었다. 그것과 그 생각의 거리는 무척 가까워서, 결국 시라부는 그 생각에 닿아버렸다.
그렇다면, 나는 그냥- 소모품인가?
그 순간 마주치고 있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시라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저, 쏟아내기 시작했다. 세미는 그런 시라부를 보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무엇으로 달래야하나. 세미는 시라부에게 손을 뻗어 입을 열려다가 일순간 멈추었다. 세미는 시라부가 어째서 우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세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시라부를 자연스레 품에 안았다. 시라부는 멍하니, 울고 있었다. 허공을 응시하면서. 세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시선에 자신을 맞추었다. 너는 나를 보고 우는 거야, 그런 거였으려나. 세미는 괜찮아, 괜찮아, 울지말고 천천히 이야기해- 이런 말들을 시라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알 수 없는 울음에 향하는 손길은 정말로, 따뜻했다.
시라부는 그래서 울음을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쉽게 멎지 않았고, 세미는 그런 시라부를 더 따뜻하게 안아주며 토닥였다. 이런 얘기를 해도 괜찮을까? 괜찮으려나. 그렇지만 세미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입을 열어야할 것만 같았다. 시라부, 무슨 일이야? 말해봐, 괜찮아, 괜찮으니까. 울면 그 얼굴 다 망가진다구. 그래도 나는 좋지만. 시라부, 시라부? 듣고 있어? 시라부는 그저 듣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떴다. 울음이 점점 멎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떼었다.
"세미상, 그게.."
세미는 그말을 듣고 시라부를 품에서 풀어주었다. 시라부는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 품에서는 말들이 잘 나올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울고 난 뒤의 히끅거리는 소리와 너무 울어서 어지러워진 머리탓에, 자신도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래도 시라부는 세미의 눈을 보며 이야기를 애써 풀어나갔다. 다정한 눈, 내가 비치는 눈. 그 눈이 지금 다른 쪽으로 물들고만 있는 것 같았다. 시라부는 입을 멈추었다. 더 이상 말하면 안될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무슨 소리를 한거지, 세미상 앞에서.
"어, 시라부... 그래서 이야기는 다 끝난 거야?"
세미는 시라부의 눈을 보았다. 입을 다문 시라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세미는 그 이야기를 대충이나마 알아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구체화도 시켰다. 그렇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연인이 울면서 토해내듯 말한 이야기라도 속이 체할 것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3학년 비주전. 너는 주전 세터. 감독님에게 인정받는 건 결국 너인데, 너가 그렇게 울면 나는 뭐가 되는 거야. 세미는 그런 생각이 치솟아 어찌할 수 없었다. 울먹거리는 눈의 시라부를 보면 아예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 세미는 입술을 씹었다.
"그, 선배, 제가 한 얘기는 그냥-"
시라부는 굳어있는 표정의 세미를 바라보면서 어찌해야할지 몰랐다. 뭐지, 내가 잘못한건가. 시라부는 그러나 말을 끝내지 못했다.
"난 그냥 이런 존재야?"
"예?"
세미가 그렇게 말을 해왔기 때문이다. 세미의 눈은 화, 라기 보단 질투를 더 담지 않았을까. 질투라, 그것은 욕정을 안은 감정이었지.
"항상 너는 우시지마 얘기밖에 하질 않아. 우리가 사귀는 거 아니었어? 이거 완전, 그냥 아는 선배한테 애정 상담하는 것 같잖아. 너가 짝사랑하는 상대가 남한테 고백했다고 울면서 달려온 것 같잖아. 아니야?"
시라부는 멍하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그저, 나의 이손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모르겠어서, 울었을 뿐인데. 시라부는 손을 보았다. 이번엔 그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세미를 보았다.
"네..? 세미상,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말 틀려? 가끔은 너가 누구랑 사귀는 건지 헷갈다고. 나 아니였어? 아니면 우시지마랑 사귀고 있나? 나는 그냥 고민상담 상대인가? 너가 나한테 말해오는 걸 생각해봐. 오늘 우시지마 상이, 방금 우시지마상이, 아아- 우시지마상! 우지마상!"
세미는 쏟아냈다. 말을 입 밖으로 쏟아냈다. 그것은 본디 쌓여있던 감정이 기폭제를 만나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꽤나 깊은 질투, 열등감. 세미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흠칫했지만, 멈출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답을 들어야겠어, 시라부. 세미는 시라부의 눈을 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 황당하다는 눈, 그리고 떨리고 있는 눈.
"우시지마상은 그저 동경하는 에이스일 뿐이라고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이나고, 딱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라부는 그렇게 떨리는 눈으로 소리쳤다. 본디 시라부는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덜덜 떨 아이는 아니었던 까닭이다. 세미는 허, 입의 허공을 혀로 차내었다. 시라부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울음으로 차갑게 식었던 그들의 분위기가, 이제는 뜨거웠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맨날 너가 이야기 하는 게 그거잖아? 틀려? 틀리냐고!"
".....하지만...."
시라부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회상해보라, 시라부는 분명 그랬다. 세미상은 그걸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며 받아주었지. 시라부는 그것이 그저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었는데. 시라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시라부? 그 부름에 시라부는 세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아, 상처받은 눈이다. 상처받은 눈이야. 미안해요, 미안해. 시라부는 결국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입안에서 차마 뱉어내지 못한 채.
그때, 시라부의 턱이 잡혔다. 세미의 손이였다. 세미는 그대로 입술을 맞춰왔다. 시라부의 눈이 커졌다. 세미의 손은 거칠게 시라부를 잡았지만, 그의 입술의 온기는 너무 다정했고, 그 입맞춤도 따뜻했고, 자신의 입 안을 훑는 혀도 너무 다정하기 그지없어서, 시라부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요, 미안해... 시라부는 그 입맞춤 속에서 뱉어질 수 없는 말들을 속으로 몇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세미는 숨을 뱉어냈다. 꽤나 긴 시간이었다. 시라부는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세미를 보았다. 둘다 호흡을 거칠게 뱉어냈다. 정말로 깊은 입맞춤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시작. 이대로... 세미는 말을 흘렸다. 시라부는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황급한 눈이다. 지금 엉망진창인데, 나. 괜찮아요? 그 말에 세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시라부는, 옷의 단추를 풀었다. 다시 세미는 시라부에게 손을 뻗었다. 부실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나는 어느날 눈을 떴다. 시야가 온통 푸른빛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한 번 떠보았다. 향긋한 숲의 향기가 나를 가득 채우는 듯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레 발을 들어 바닥을 밟았다. 바닥에는 풀이 가득 자라있었다. 나는 그 생경한 촉감에, 간지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발을 떼었다. 그러나 발을 계속 떼려 몸을 들어도 다시 나는 풀을 밟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걷기 시작했다. 걷고 또 걸어도 제자리인 느낌이었다. 키가 큰 나무들이 잔뜩 자라있었다. 그늘이 짙었다. 나는 그 녹빛이 세상의 전부인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내가 '하늘'을 보게 된 것은 더 많이 걷고 걸은 뒤였다. 햇빛이 눈부셨다. 나는 눈을 찡그리고 다시 떴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나와 같이 걸어 다니는 존재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따라 해보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했다. 나는 사람들을 보는 걸 좋아했다. 그들은 내가 있는 것조차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풀숲에 누워 그 시원한 공기를 들이키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그것도 만만치 않게 즐거웠다.
사람들은 서로를 무언가로 호칭하고는 했다. 나는 무엇으로 불릴까?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으니 있어도 소용이 없으려나? 나는 어쩌면 사람들이 나와 대화해주지 않는 것은 나에게 이름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그래서 나의 이름을 짓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떠오른 것은 히나타, 히나타 쇼요.
나는 히나타 쇼요, 말을 걸어주세요.
그렇지만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나는 정말로 외로웠다. 그렇지만 내가 기운을 잃고 우울해한다면 정말로 나의 말을 들어주는 이가 없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힘을 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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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나는 내 또래로 보이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래서 그 애를 봤을 때 괜히 반가웠다. 먼저 말을 걸어보면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또 무시당하지 않을까? 나는 입을 다물고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향하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때 나무 아래에 쭈그리고 있었다. 여름이었기 때문이다. 여름의 햇볕은 꽤나 따가웠다. 그렇지만 나무가 제일 울창한 때이기도 했다.
나는 햇빛을 피해 계속 그곳에 있었다. 나무 그늘은 시원했다. 그렇지만 지루학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냇가에 가보기로 했다. 오늘따라 더 더운 것 같다. 냇가에서 몸이라도 담가볼까. 그리고 돌멩이로 탑도 쌓아보고 싶었다. 저번에는 높이 쌓다가 누군가 와서 숨어버렸었지. 오늘은 그날보다 더 높게 쌓아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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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그 애다. 나는 괜히 반가웠다. 아까 조금 전에 본 그 아이가 냇가에 이미 와있었다. 냇가에 앉아 발로 물을 차고 있다. 꽤나 부루퉁한 표정이다. 심심한 걸까? 혼자 손장난을 치기까지 하는 그 애에게 나는 괜스레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뭐해?"
그러면서 빤히 바라보았는데, 표정이 꽤나 놀란 듯 했다. 나를 보았다. 나를 보았어! 나는 무척 기뻤다. 나를 보고 놀란 게 맞겠지? 나는 혹시 내 뒤에 누군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고개를 돌려보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그 아이가 보고 놀랄 만한 상대는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어…, 할머니 집에 왔는데 집에 앉아만 있으니 너무 심심해서 나왔어…"
그리고, 내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나는 정말로 기뻤다. 그래서 나는 활짝 웃었다. 냇물에 나의 얼굴이 살짝 비친 것도 같았다. 나는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말을 걸어주었어, 안녕! 반가워! 나의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나의 말에 대답해 준다면 하고 싶었던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에 이리저리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하기로 했다. 꼭 해보고 싶었어.
"나는 히나타 쇼요! 여기에 살아. 너는?"
나는 아이의 이름이 듣고 싶었다. 세상에, 정말 이름을 교환하는 걸까? 이름을 알려줄까? 이렇게 하는 것이 맞겠지? 나는 심장이 두근두근 대는 것만 같았다. 아이는 살짝 당황한 표정이다가, 눈을 한번 깜빡거린 뒤에 입을 열었다, 아- 나를 향한 목소리란 이렇게 행복한 거였구나.
"카게야마 토비오."
나에게 건네진 이름이란 것이 너무나 소중해서, 나는 몇 번이고 그것을 곱씹었다. 카게야마 토비오- 카게야마 토비오- 그렇게 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아, 행복해. 나는 해보고 싶은 말이 더 남아 있었다.
"나랑 놀자!"
나는 그날 처음, 친구라는 것을 사귀었다.
-
"아, 이제 가야할 시간이다."
붉은 저녁노을이 져가고 있었다. 나는 카게야마와 보내는 시간이 너무 즐거워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 풀밭을 같이 것도, 냇가에서 같이 물장구도 치고, 나무를 타기도 했고, 여러 가지 열매들을 따서 먹기도 했고, 부셔서 손을 색색깔로 물들이기도 했다. 이건 먹으면 되게 신맛이 나, 이건 단맛, 이건 약간 써. 카게야마는 숲을 잘 아는 나에게 감탄스럽다는 눈빛을 했다. 나는 괜히 뿌듯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헤어질 시간인 모양이었다.
"내일 또 올게."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기쁜 마음에 가득 차서 손을 흔들었다. 내일이 너무나 기다려졌다. 아, 이게 설렘일까. 나는 풀숲에 누웠다. 그 촉감이 새삼스럽게 너무 부드럽고 좋았다. 점점 어두워져가고 있다. 아, 너의 눈의 색깔 같아. 카게야마는 살짝 밝은 밤하늘의 눈과, 깊은 밤하늘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나의 색은 어떤 색일까? 카게야마에게 내일 물어봐야지. 나는 카게야마의 얼굴과, 그 목소리와, 그리고 그 이름들을 되새기며 눈을 감았다.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
"너는 태양을 닮았어."
나는 며칠 뒤에야 내 눈과 머리가 무엇을 닮았냐고 물었다. 그 애와 노는 게 너무 즐거워서 질문해야한다는 걸 까먹은 탓이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색이 밤하늘을 닮았다는 말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기분 좋은 듯한 표정을 짓고는, 나의 색을 묘사해주었다. 태양. 태양. 나는 그런 색이구나. 응, 너는 눈도, 머리도 태양의 색처럼 반짝반짝해서 예뻐.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카게야마를 안았다. 카게야마는 당황하더니, 이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표정도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정말로, 상냥한 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카게야마는 거의 항상 들뜬 표정으로 냇가에 왔는데, 어째서 오늘은 꽤나 어두운 표정이었다. 살짝 심각해 보이는 듯한 표정에 나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이 들었다. 카게야마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꺼내지 않아서, 나는 꽤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카게야마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우리 할머니가 여기는 나 같이 어린 애가 살지 않는대. 너는 없는 사람이래."
아. 나는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카게야마는 살짝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무슨 소리야 카게야마? 너네 할머니가 뭘 잘못 아시는 거겠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다.
" 그 말이 진짜야? 그럼 넌 귀신같은 거야? "
카게야마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눈빛이었다. 나도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렇기에 입술을 한번 깨문 뒤에 입을 열었다.
"아냐! "
카게야마의 눈이 크게 커졌다. 아냐, 아냐, 난 죽은 존재가 아니야! 나는 부정했다. 어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시야에서 카게야마가 흐려져버리는 것이 싫었다. 난 귀신같은 거 아니야!
아, 너무 소리를 질렀나? 나는 카게야마가 나에게 실망할까봐 두려웠다. 나 이제 너랑 안 놀 거야, 소리 질렀잖아, 아니면 너는 귀신이잖아- 나는 눈을 꽉 감았다. 옷깃을 잡은 손이 바들거렸다. 카게야마의 눈을 마주치기 무서웠다.
"그래."
어? 나는 눈을 떴다. 카게야마의 눈은 맑았다. 맑고 푸르렀다. 아, 그 맑은 눈동자 안에 비치고 있는 내가 못나보여서 나는 왜인지 부끄러웠다. 그리고, 너는 나를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지. 넌 귀신같은 거 아니야."
나는 울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너는 나를 달래주려 했다. 야, 울지 마. 울지 마. 왜 울어어. 나는 네가 그래주는 것이, 정말로 나를 걱정하는 친구의 모습 같아서 더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카게야마의 품에 파고들었다. 너는 부드럽게 품을 열어주었다. 품이 따뜻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살짝 멎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던 걸까. 어느새 해가 졌다. 카게야마는 울음을 그치고 호흡을 고르는 나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우리는 서로 말을 나누지 않고 땅거미가 진 냇가를 걷기 시작했다. 반딧불이가 찌르르 울었다. 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이름 모를 벌레의 구애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침묵했지만, 그러면서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카게야마가 손을 놓았다. 나는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너의 입이 살짝 떼일락 말락하는 것이 보였다. 곤란한 표정을 하며 몸을 돌려 등을 보인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나는 이제 집에 가야하거든."
나는 어쩌면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리고는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 눈이 커졌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하나는 밤하늘의 눈이었고, 하나는 빛나는 태양의 눈이었다.
"나, 나 내년에도 올 테니까! 내 후년에도, 그 다음 해도 곡 올 테니까…"
너는 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다음에도 나랑 놀아, 히나타!"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몸에 열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붉었다. 귀여워, 이말을 하려고 그렇게 고민한 건가. 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래, 항상 같이 놀자!"
그리고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제일 밝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카게야마의 눈이 크게 뜨인다. 그리고 나에게 점점 다가왔다. 우리의 몸이 닿았다. 쿵쿵, 이건 너의 심장소리일까, 나의 심장소리일까. 그리고 입술이 닿았다. 네가 먼저 나의 입술에 너의 입술을 맞추었다.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반딧불이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냇가는 푸르렀다. 아, 초록색, 초록색 입맞춤이다. 나는 그 빛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심장이 쿵쿵 대는 것은 아마, 우리 둘 다일 것이다.
네가 먼저 입을 뗐다. 나도 눈을 떴다. 너의 얼굴이 실컷 붉어져 있다. 나는, 글쎄, 몸까지 빨개지지 않았을까. 열이 확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뭐, 뭐하는 거야! 너도 만만찮게 허둥댔다.
"모.. 몰라! 좋아하는 사람한텐 이렇게 하는 거랬어!"
너는 그렇게 말한다. 미치겠다. 심장이 이렇게 뛰다간 죽어버리는 거 아닐까? 나는 고민하면서 물었다. 누가? 너는 꽤나 뜸을 들인다.
"테레비…"
그게 뭐야!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웃지 마, 웃지 마! 소리치지만, 그 모습마저도 귀엽기 그지없어서 나는 계속 웃었다. 그리고 나의 웃음소리와 너의 웃음소리가 겹치기 시작했다. 힐끗 쳐다본 밤하늘의 색은, 너의 머리 색이였다. 마지막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미안해,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나는 그곳을 떠났다. 카게야마가 과연 찾아왔을까? 내가 없다는 걸 알고 슬퍼하고 있을까?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하지만 나는 겁쟁이라서, 네가 찾아오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나는 그 관계가 너무 소중해서, 깨질까봐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렇게 세상을 떠돌았다. 나는 어떤 존재인걸까. 귀신일까. 그렇지만 나는 죽은 적이 없는 걸. 그런 생각도 많이 했다. 세상은 별의 별 것이 많았다.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구경하고, 재미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생각은 한 곳으로 닿아버린다.
나의 말을 들어주고, 나와 놀고, 나를 안아주고, 나에게 입맞춰준 너.
보고 싶어.
그래, 나는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나는 결국 그곳으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이제 네가 나를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나의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꼭 기다리고 있어줘. 나는 욕심이 많았다.
-
너가, 있다.
너의 뒷모습을 봤을 뿐인데도, 살아있다는 감각이 들었다. 맞아,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살아있다는 기분이 가득 찼다. 그리고 지금도. 너는 키가 컸다. 나는 조금밖에 크지 않았다. 밤하늘 같은 검은 머리는 여전했다. 그리고 너의 밤하늘 같은 눈이 보고 싶었다. 너는 한숨을 쉬며 냇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는 너의 머리를 헝클인다. 나는 너의 등을 톡톡 쳤다. 그리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 뭐 하고 있어, 카게야마? "
네가 몸을 돌린다. 눈이 커진다. 잊을 수 없던 밤하늘 같은 눈이 아름답다. 너는 곧 놀란 표정을 가다듬고,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집 문을 두드렸다. 오이카와는 문을 열었다. 오이카와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반복되어 왔다. 단 하나 특별한 것은, 오늘의 날짜 정도였다. 카게야마는 신발을 벗었다. 맨발이었다. 오이카와는 꽤나 추웠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늘은 코코아를 타 줄 생각이었다.. 추운 날이었다. 밖에는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집은 창이 컸다. 그 창으로 비치는 세상에는, 흰 눈이 세상을 덮고 있다. 물이 다 끓은 모양이었다. 커피포트의 등이 꺼졌다. 오이카와는 포트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코코아 분말을 부어놓은 흰색 컵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두 잔에 적당히 중간 정도 붓고 난 뒤에 오이카와는 커피포트의 물을 싱크대에 버렸다.
"코코아입니까?"
"응, 토비오 입맛이 그거잖아?"
카게야마는 거실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엌에서 오이카와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던 모양이었다. 살짝 놀리듯이 말을 했는데, 카게야마는 수긍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이카와는 그런 카게야마의 반응이 꽤나 흥미로웠다. 예상에서 벗어나진 않지만, 그렇다고 원하던 것은 아닌 반응.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그런 존재였다.
"오이카와씨는요?"
"나도 물론, 코코아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찾아오던 모든 날들에 항상 같은 음료를 내어와서 마셨다. 겨울에 들어서던 순간부터는 따뜻한 음료를 끓여주고 있었다. 그리 자주 오지 않는 손님을 위해서, 오이카와는 여러가지 차 종류들과 타줄 만한 음료들을 구비해놓았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평소에는 잘 타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두 잔에 우유를 살짝 부었다. 그리고는 스푼으로 코코아를 다 저어서, 살짝 맛을 보았다. 적당히 달았다. 오이카와는 다 됐어, 라고 말했다.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코코아 잔을 양손으로 들었다. 잔을 만지면 뜨거울 텐데,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하며 컵의 손잡이를 한손으로 잡았다.
카게야마는 배구를 보고 있었다. 요즘은 배구시즌이니 카게야마에게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좀 다른 걸 봐도 좋았을 텐데, 오이카와는 코코아를 거실 탁자에 내려놓으며 리모콘을 들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아?"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모르지는 않구나, 오이카와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채널을 돌렸다. 여러 채널들에서 다양한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크리마스 이브였다. 오이카와는 창밖을 힐끗 봤다. 계속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겠네, 오이카와는 중얼거렸다. 카게야마는 배구 채널을 돌려버린 이후 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표정이 너무나도 잘 읽혀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카게야마는 그가 웃는 것이 틀어놓은 시답잖은 예능 프로그램 때문일거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오이카와는 그 말이 무언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럼 오늘 밤이 무슨 의미를 가졌는 지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아, 토비오 멍청이. 예? 오이카와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소파에 축 늘어졌다. 코코아는 식어버렸다. 오이카와는 깜빡했네, 하면서 식은 코코아를 마셨다. 카게야마의 잔은 이미 비워져있었다.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할까, 오이카와는 잔을 잡은 오른손 중지손가락으로 잔을 톡톡 쳤다.
"원래 크리스마스 전날 밤은 연인과 함께 맞는 건데…"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의 연인을 생각한 걸까. 그래, 연인. 코코아가 바닥을 드러냈다. 오이카와는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오이카와는 떠올려보았다. 그날 카게야마는 고백을 받았다고 했고, 그래서 받아들였어? 라는 오이카와의 대답에 그렇다고 했다. 오이카와는 허탈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왜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해주기 시작했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싸우면 나를 찾아와. 문을 열어줄테니.
카게야마는 그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일까. 오이카와는 헤어지면 나에게 오라는 뜻이라고 해본 말이었지만, 카게야마는 그저 그 뜻으로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카게야마는 어느날, 오이카와의 집 문을 두드렸다. 오이카와씨, 저희 싸웠어요. 오이카와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래, 토비오. 그 뒤로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자주 찾아왔다. 연인 사이는 꽤나 삐걱거리는 듯 했다. 잘 맞을 줄 알았는데, 오이카와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평화로운 침묵의 시간이었다. 티비 소리만이 가득 채웠다. 시간은 그저 흘러갔다. 카게야마는 소파 왼쪽에 기대 티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자? 아니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머리를 만졌다. 카게야마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오이카와는 그 감촉이 좋았다. 그리고 카게야마의 짜증내는 듯한 반응도 좋았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머리를 살짝 헝크리는 걸 좋아했다. 오이카와는 티비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카게야마도 그것은 마찬가지 일텐데,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쳐다보지 않으려는 듯이 티비에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밖에는 아직도 눈이 오려나, 어두워져서 더 이상은 멀리서는 분간이 되지 않는다. 오이카와는 일어나서 창으로 다가갔다. 눈발이 아직도 굵었다. 내일 카게야마가 돌아가는 길은, 눈으로 가득 덮여져 있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렸다. 카게야마는 아직도 그러고 있었다.
"오이카와씨, 방에 안 들어가시나요?"
카게야마는 그렇게 물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찾아오면 항상 그를 소파에서 재우고, 자신은 방의 침대에서 잤다. 그것이 그들의 거리였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오늘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왜냐하면,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였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그것뿐만은 아니지만.
"아니, 나도 오늘은 여기서 잘거야."
오이카와는 탁자를 치웠다. 그리고 이불을 깔았다. 카게야마는 살짝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조금 솔직해지면 좋을텐데,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토비오, 이건 너 이불. 오이카와는 이불을 휙 던졌다. 카게야마는 붙잡고 난 뒤 눈을 껌뻑거렸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재워주셔서."
카게야마는 두번째로 자신의 집을 두드리던 그 때 이후로 항상 그런 말을 했다. 오이카와는 오늘따라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파란 이불을 감고 소파에 누운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매일 재워줄 수도 있어."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불을 뒤집어 썼다. 이불에 가려진 얼굴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오이카와는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이제는 불을 끌 시간이었다. 그들이 서로를 마주하며 바라보던 공간은 곧 암흑으로 뒤덮였다. 오이카와는 이불을 찾아 누웠다. 좀체 암흑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이불을 뒤집어쓴채 잔 듯했다. 오이카와는 아쉬웠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먼저 잠이 들면, 그 얼굴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창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은 몇시일까, 12시가 되어 이미 크리스마스 당일이 되었으려나? 그렇지만 오이카와는 확인하지 않았다. 카게야마와의 크리스마스 이브 밤이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 멀리서 종이 울리는 것이 어렴풋이 들려온 것 같기도 했다.
-
빛이 밝았다. 아침 햇살은 꽤나 따가웠다. 넓은 창은 햇빛을 가득 들였다. 오이카와는 먼저 일어나 물을 들이마셨다. 크리스마스.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창밖에는 눈이 가득하다. 카게야마도 머지 않아 눈을 떴다. 오이카와는 물을 건넸다. 카게야마는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졸린 듯한 눈을 비빈 뒤 머리를 다듬는다.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이다. 오이카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곧 돌아올 말을 알기 때문이다.
"저, 이제 가겠습니다. 오이카와씨."
오이카와는 그런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시간이 왜 이리도 빠를까. 너가 맨발로 우리집에 발을 딛던 때로부터 얼마나 지났다고 말이야. 오이카와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평소와는 다른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지 말라고, 계속 여기 있어도 좋다고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카게야마는 왜냐고 물어 오겠지, 오이카와는 대답할 수 없을 것임을 알았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먼저 말해온다면 좋을텐데.
"잘가."
"감사합니다."
오이카와는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카게야마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잡았다. 킨 것은 이틀 전에 온 문자였다. 이미 확인한 문자다. 그렇지만 한번 더 보고 싶었다. 지금 이밤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싶었다.
헤어졌어요. 오늘.
그것은 카게야마의 연인, 아니 옛 연인에게서 온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한번, 카게야마와 함께 보낸 밤을 되새겼다. 그러니까, 단 둘이 보낸 크리스마스 이브 밤을. 카게야마는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집을 찾았을지. 아아, 솔직하지 못한 토비오. 오이카와는 미소지었다. 꽤나 환한 미소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하루에 어둠이 드리울 때면 일상처럼 그의 방을 찾았다. 오이카와는 항상 어둠 속에 존재하는 그를 위해 방의 빛을 밝히지 않은 채로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것은 어느덧 일상이 되어버린 채로, 항상 둘은 그들만의 어둠을 지새웠다.
“당신은 밤의 신이잖아?”
어느 날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런 질문을 해왔다. 카게야마는 그 당연한 명제에 새삼스럽다는 듯이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머리를 갸우뚱거리고 카게야마를 바라본다. 카게야마는 그런 오이카와를 빤히 응시하며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새벽이 깊다. 밤은 이제 오이카와에게서 떠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입을 떼어, 내일은 꼭, 어둠이 내리는 순간 바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 정도야 쉽지만.”
카게야마는 일단 순순히 대답했지만, 의아함이 목소리에 가득 묻어났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몹시 입 밖으로 내뱉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겨우 입술을 꾹 눌러 담았다. 원래 스포일러가 없는 편이 본편을 더욱 즐겁게 할 수 있는 법이니까. 오이카와는 침대에 털썩 퍼질러 누워버렸다. 카게야마는 그런 오이카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가볍게 맞추었다. 그런 카게야마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밤의 신은 이 땅에 드리워있던 어둠을 거두었다.
밤이 잦아들고 낮이 찾아오는 것을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오늘 다시 그가 어둠을 드리우러 오는 순간이 기다려져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별로 남지 않았는걸, 오이카와는 일단 짧은 잠을 청하기로 했다.
-
“…이게 무슨?”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황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런, 꽤나 멍청해 보였을 거 같은데. 카게야마는 그렇게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겐 다행이게도 오이카와는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입으로 바람을 불라고 말했다. 입으로 호-하는 거라며 직접 시범까지 보였다. 케이크는 짙은 갈색, 아마도 다크 초콜릿으로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꽂힌 여러 개의 촛불들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순간 오이카와가 자신을 놀리는 건가 고민했다.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거라 보는 건가? 지금 구시대적인 밤의 신님을 위한 신문물 교육이라도 하는 건가? 같은 시답잖은 고민. 하지만 오이카와의 표정은 전혀 그런 걸 담은 눈으로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조심스럽게 오이카와의 시범을 따라했다. 몇 개의 불이 꺼지기는 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오이카와는 더 세게 불라며 격려 비슷한 말을 계속 건넸다. 카게야마는 너무 어색했지만 여튼 최선을 다했고, 카게야마의 미숙한 바람 불기로 인해 몇 번의 시도 끝에야 촛불이 꺼졌을 때, 오이카와는 박수를 쳤다. 짝짝짝- 그리고,
“카게야마.”
이어진 말은, 카게야마의 생일이 오늘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그제야 오이카와의 의도를 파악한 카게야마는 웃음을 터뜨렸다. 오이카와는 왜 웃는 거냐고 소리치며, 진짜로 생일 선물까지 준비해두었다고 말했다. 마음에 안드냐는 오이카와에 물음에 카게야마는 좋아, 좋아. 당연히, 라고 속삭이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밤의 신은 그렇게 환하게 웃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그래서 오이카와는 그의 활짝 웃는 표정을 보고 뿌듯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카게야마는 궁금한 것이 있었다.
“초는 왜 큰 초 4개에 작은 거 6개야?”
오이카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이카와는 살짝 떨리는 말소리로, 자신 특유의 3인칭도 덧붙여가며 자신이 그 초의 개수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것이 지구의 나이를 본 딴것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카게야마는 이번엔 소리를 내서 웃기까지 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비웃음이라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밤의 신은 언제나 표정 변화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의 그런 모습이 반가울 뿐이었다.
오늘은 밤이 제일 긴 날.
만약에 진짜 생일을 모른다 하더라도 내가 정해주면 된다고 생각했어-, 라며 속삭이는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귀에 조심스레 차곡차곡 담으면서, 정말 오이카와다운 생각이라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둘이 그렇게 옥신각신 하던 순간이 지나갈 무렵, 카게야마는 어두워진 밤하늘을 힐끗 쳐다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좋아했다. 그것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빛과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도 카게야마의 시선을 좇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이 참으로 고요하게도 세상을 덮어가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선물까지 준비했다던 오이카와의 말을 기억했다. 그리고 선물은 어디 있냐며 물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방을 두리번거리는 카게야마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봤자 못 찾는다는 뜻이었다. 카게야마는 괜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오이카와는 그런 카게야마를 보며 미소를 금치 못했다.
오이카와는 꽤 고민을 했다. 카게야마는 신이었고, 그저 어둠을 뿌리고 거두는 일을 할 뿐이었다. 자신과 달리 필요한 것은 없는 존재였고 자신이 준 무언가를 받아 보관할 공간도 가지고 있기는 할까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마침내 선택하여 고른 것은-
“토비오.”
그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이름을 선물하기로 했다. 카게야마는 처음에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눈만 깜빡거리다가, 곧 이해하고는 정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이카와는 오늘 카게야마의 웃음을 이렇게 많이 보다니, 곧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속삭였다. 이제 당신은 카게야마 토비오, 내가 지어준 이름을 영원히 안고 가주기를. 그렇기에 부디 이 선물을 거절하지 말아달라, 는 간절함이 너무 담겨서 그가 부담스러워할까봐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오이카와는 속으로 삼키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필멸의 인간임을 잘 알았다. 그러나 밤의 신은 영원을 살아갈 것이다. 오이카와는 그랬기에 자신의 선물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당신은 어떨까? 오이카와는 가슴이 떨려 내려놓은 시선을 올려 카게야마의 밤하늘과 같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아, 그 안에 환희가 가득하다.
카게야마는 한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응, 이제 나에게도 이름이 있는 거야. 영원히 가져갈게. 꼭. 오이카와는 자신의 선물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가슴이 떨렸다. 밤의 신은 이름을 지어준 이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카게야마는 그저 입술로 내뱉은 세 음절일 뿐인 그 선물의 크기가 영원의 무게와도 같게 느껴져서, 그 소중함에 가슴이 떨렸다.
눈이 차곡차곡 내리고, 제일 긴 밤이 흘러가고 짙어가고 있었다. 둘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오이카와는 시선을 돌렸다. 창틀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 오이카와는 흰 눈으로 덮여져 겨울의 밤이라는 것을 너무도 쉽게 알려주는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나는 원래 여름을 좋아했어."
그렇게 자신의 기호를 표현하는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는 어떻게 답을 주어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밤의 신에게는 계절이 무의미하기에 딱히 뭐 좋고 나쁘다를 따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 다음 말이 자신의 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로 이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카게야마는 말을 하지 않고 오이카와의 입술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그렇지만 이제는 겨울이 좋아."
카게야마는 자신의 눈을 밝은 표정으로 응시하면서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눈부시다. 밤의 신은 뜨거운 태양빛을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오이카와의 그 미소가 마치 빛과 같다고 생각했다.
"당신과 오래 있을 수 있으니까."
그 말만을 기다린 듯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성큼 다갔다. 미소로 가득 찼던 오이카와의 표정이 살짝 옅어졌다. 둘이 눈빛이 마주친다. 그리고, 둘 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각자의 얼굴을 내밀어 입을 맞추었다. 그 입맞춤이 꽤나 격렬하나, 그런 둘의 모습이란 어째서인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그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으나 인간의 숨이란 언젠가 차오르기 마련이라 둘은 결국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득 차오른 숨을 거칠게 내뱉고 다시 들이쉬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카게야마는 길고 길 이 밤이 아까워졌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눈짓했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토오루, 토비오- 입술이 부드럽게 울리며 내뱉은 소리가 마치 서로 맞닿는 듯 하였다. 넓은 침대의 품은 푹신했고, 서로의 품은 더욱 따스했다.
하얀 눈으로 덮여 고요하기 그지없는 밤, 그들의 귀에 닿는 것은 서로의 소리뿐이었고, 눈에 닿는 것은 서로의 살결뿐이었으며, 닿는 것은 서로의 숨과 그 자체였다. 그리고 오직 그들을 지켜보는 것은 다 떠올라 이제 기울어갈 달 뿐이었다.
"오늘은, 밤이 무척 길거야."
밤의 신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밤의 신에게 이름을 선물한 인간은, 자신이 주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깊고 무겁게 속삭였다.
나는 이렇게 생겼어. 내 이름에 히나타는 햇살이라는 뜻이래. 어른들이 그랬는데, 그게 나랑 잘 어울린다고 했어! 그렇지 않아? 에이, 대답해주기만 하면, 내가 다들 빛나는 태양을 닮았다고 말한 햇살을 담은 미소를 보여줄 텐데.
그러니까, 대답해줘-
1.
-아저씨, 아저씨!
시끄러워, 나는 덮고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어버렸다. 시끄러운 소리가 조금은 멀어진듯하다. 그렇게 멀어진 소리를 신경 쓰지 않으려 하며 다시 잠에 빠지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차가운 느낌이 온 몸에 찾아왔다. 이불의 따스한 느낌이 없어져버린 것이었다.
젠장, 망할 꼬마!
나는 속으로 그런 종류의 소리를 외치면서-잠을 너무 잔 탓에 목이 잠겨 실제로 행하지는 못했다-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선명해지는 시야에서 보인 것은 주황색의 꼬마였다. 언제나 같은 휴일이었다. 저 애는 잠도 안자나, 나는 처음에 툴툴 거리며 생각하다가
아- 쟤는 죽었지.
그런 생각에 닿아버리는 것이었다. 이 활기 넘치는 꼬마가 이미 목숨이 다한 존재라는 것이 가끔 나는 와 닿지 않았다. 이 애가 귀신치고는 너무 활달한 거 아닌가 싶다.
“꼬마! 얼마만의 휴식일인데 자꾸 방해할래?!”
소리 지르며 이불을 찾자 꼬마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 눈빛이 간절하다. 심심하다는 거겠지, 함께한 세월이 꽤 되어버려서 그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꼬마가 아니라 쇼요라고요!
아 내가 잘못 생각했다. 정정하겠다. 간절하긴 무슨, 그냥 시끄럽다.
2.
휴일에 꼬마는 항상 나와 놀아달라고 졸랐다. 배구 경기나 훈련을 한다고 나는 집에 있지 않을 때가 많았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쟤가 집에 얌전히 있어서 심심한 게 아니다. 항상 내가 어디를 가건 꼬마는 곁에 있었다. 아무리 귀신이라도 어린 애를 혼자 집에 놔둘 수는 없지. 물론 꼬마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알면 분명 발끈할 것이다. 자기는 어린 애가 아니라면서. 웃기는 꼬마다. 나보다 스무 살 정도는 어리면서, 어린 애가 아닌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다니.
3.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 꼬마와 놀아준다고 상가에 나와 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쉬겠다고 우겨보았지만 결국 끌려나와버렸다. 꼬마의 고집은 정말로 대단했다. 나는 애초에 밖을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보는 귀신이 그저 쇼요 뿐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대체 뭘 사야하나. 처음에는 귀신에게도 진짜 돈을 써야하는 건가 생각했는데, 꼬마는 그런 나의 질문에 그럼 가짜로 주게요? 라며 활짝 웃었다. 그 미소가 꽤나 환하고 순수 보여서 나도 모르게 알겠어, 라고 대답해버렸다. 내가 후회하는 일 탑5를 꼽으면 아마 순위권에 들지 않을까 싶다.
“뭐 사고 싶은데.”
나는 조용히 낮게 중얼거렸다. 다행스럽게도 이 꼬마는 꽤나 귀가 밝았다. 그 덕에 존재하지도 않는 상대와 계속 대화를 하는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고 있지 않을 수 있다-음, 부디 예외가 없기를-. 내가 혼잣말 엄청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케이크!
그렇게 외치는 꼬마는 평소의 신나 죽겠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도 언제나 짓는 밝은 표정은 여전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꼬마는 나의 수락에 엄청 환호를 지르고 기쁨의 춤인지 뭔지 하는 몸동작을 취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자신감 덕분에 저렇게 활보할 수 있는 건가. 나는 보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만.
4.
우리, 아니 내가 산 것은 내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였다. 결코 내 의견이 반영된 것은 아니다. 결코. 요즘 별로 신경을 못 써줬다고 사과의 의미로 사주려고 한 거였으니까 말이다. 꼬마가 그런데 마침 딸기 맛을 골랐을 뿐이다. 이거, 어차피 쟤는 못 먹을 테니까 내가 다 먹을 텐데. 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이제 쉴 테니까, 먹어.”
그래도, 꼬마는 먹는 기분을 실컷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불을 덮었다. 목까지 추켜올린 이불을 온 몸에 감듯이 했다.
밖에 나가면 온갖 것들이 나를 바라보는 느낌으로 먹혀지는 것만 같다. 못 볼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나한테가 쇼요가 붙은 건 정말 다행인 일 아닐까. 아, 이불 속은 너무나도 따뜻하다. 나는 어느 순간 잠에 들어버렸다.
5.
“.....꼬마?”
-꼬마 말고 쇼요!
아니, 음. 그래. 그러니까, 나는 지금 몹시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해있는 듯하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여튼 나는 꼬마의 주황색 눈을 빤히 내려다보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자 했다. 어째서 이 꼬마가 어제 내가 사준 딸기 케이크에 초를 꽂아서 나에게 내밀고 있는 걸까.
……내 생일이던가?
옆에 걸린 달력에 시야가 닿아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 아저씨 생일 축하해!
아, 맞구나. 나는 꽤나 놀라버려서, 무척 커진 눈으로 꼬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꼬마는 마치 햇빛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일을 축하한다며 말했다.
“어, 어. 고마워.”
나는 당황스런 마음으로 케이크를 건네받았다. 초의 개수는 정확히, 스물여덟 개. 내 나이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구나. 나는 괜히 찡해졌다.
-라이터 불 붙이기는 어려워서 불은 못 붙였어! 아저씨가 불 붙여줘!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왜인지 너무 귀엽게 보여서, 나는 간만에 밝게 미소를 지어보았다. 그리고 기대치도 않은 누군가에게 생일을 축하받았다는 그런 기쁜 마음도.
6.
연습 중인데, 꼬마는 왜인지 오늘 먼저 집에 가버렸다. 거의 이런 적 없었는데.
7.
어둑해진 밤하늘은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비를 살짝 맞아보았다. 꽤나 굵은 것 같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비는 정말로, 싫다.
나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재킷을 벗었다. 나는 항상 마지막까지 연습을 했기 때문에 도와줄만한 동료들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활용할 수 있는 건, 내 옷 뿐이었다. 한순간 꼬마가 우산을 들고 체육관 앞에 서있는 상상과 기대를 해보았지만, 음, 다른 사람들이 혼자 둥둥 떠다니는 우산을 보며 무서워할 거라는 생각과 쇼요도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이내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나는 달렸다. 비는 너무도 차갑다.
8.
‘그날’도 비가 왔었다. 나는 비로 적셔진 땅 위에 미끄러져 쓰러진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굵은 빗방울이 눈을 맞추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날의 그 일도 이런 어둠과, 빗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내가 저주하는 이 눈을 얻게 된 것도 그 날이었다. 모든 불행의 시작도 그날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고 생각했지만, 그날 이후로 단 하루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아. 그날도, 이 날짜였던가. 겨울,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
내가 생일을 더 이상 챙기지 않게 된 건 그런 이유도 있었던 걸까. 애써 닫아놓은 생각들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틈으로 빠져나와 나의 몸을 타고 기어오른다. 생각해내기 싫은 것들이 존재하고, 망각이란 그런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터인데, 어째서 잊혀지지 않았는가.
수도를 틀어놓은 듯한 쏟아지는 물소리가, 나의 세계를 가득 채웠다. 빗발이 세차다.
나는 그날의 기억에 짓눌려, 일어나야한다는 것을 앎에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마치 그날의 그, 순간과도 같이.
9.
언제나 같은 날이었다. 나는 연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으니까 교복을 입은 채였고, 딱히 특별한 것은 없어보였다. 엄청 굵은 비가 왔다는 것만 빼면.
평소와 같다는 것은 그때까지, 나에게 무료하고 따분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오늘은 지름길로 가보자-했던 것이 그날이 아직까지 그날이라고 불리는 이유. 지름길은 포장되어있지 않은 골목 도로였다. 나는 겁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곳은 어둡고 음습했으며 자칫하면 길을 잃을 것 같은 공간, 그리고 굵은 비까지 쏟아지던 날이었는데.
나는 헤드폰을 꼈다. 빗소리가 너무 시끄럽다는 이유였다. 튼 것은 시답잖은 대중가요.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빗소리를 들리지 않게 해 줄 시끄러움뿐이었기에 꽤나 만족했다. 나는 우산을 들고 있었지만 그래도 머리가 젖을까봐 외투의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길을 걸어갔다. 아- 내가 그 음악으로 인해 듣지 못한 것은, 빗소리뿐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나의 허리를 걷어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은 정말로 묘사할 수 없던 신선한, 그리고 잔인한 고통이었다. 헤드폰은 벗겨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적의로 인해 축축한 바닥을 얼마나 굴렀던가?
그리고 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 뒤에 젤 가깝게 기억하는 것은 그저 병원의 하얀 천장. 아, 살짝 기억나는 게 있다면, 누군가가 있었고 나는 어느 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마주쳤다는 사실이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순간동안 참으로 많이 부서지고 망가져있었다. 나는 재활을 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수사에 협조해달라는 말에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리였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것이 정신적인지, 혹은 육체적인지, 둘 다인지는 나도 모른다.
10.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때부터 살아있지 않은 존재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끔찍해서 견딜 수 없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어떤 것들은 멀쩡하지만-마치 쇼요처럼-, 어떤 것들은 상해있고, 또 다른 것들은 정말로 끔찍한 몰골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것이 ‘살아있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10년 전의 나는 그런 걸 어떻게 견뎌냈을지, 나도 모르겠다. 여튼, 나는 정신과도 몇 번 들락날락했다. 의사는 그것이 그날의 후유증이라고 했다. 그것이 나의 눈에만 보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지만, 결국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미친 걸까? 나는 이따금 고민한다.
사실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나의 세계는 이미 죽어버렸는데.
11.
-아저씨, 아저씨.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아, 너무나 아득하다. 아, 잠들어버리고 싶어. 세상은 추위로 가득 차서, 너무 싫어.
-정신 차려요, 아저씨! 카게야마!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다. 나를, 부른다. 나는 눈을 떴다. 비에 젖지 않는 꼬마의 말끔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결코, 여기까지 달려오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겠지. 아,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안 돼, 아저씨! 안 돼! 주황색의 꼬마가 나를 애타게 부른다.
아, 낯설지 않은 목소리, 이 외침.
나는 어디선가 들었을까 떠올리려 했지만, 뇌까지 젖어버린 모양인지 머리는 작동하지 않고 고장 난 듯 윙윙 거렸다. 나는 너무 춥고 외로웠고 또 두려웠고 고통스러웠다.
-도와주세요!
쇼요, 그 외침은 아무도 듣지 못할 텐데, 나 말고는. 아, 그렇지. 나는 너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이렇게 잠들어버리면 안되겠지.
나는 눈을 떠서 세상을 보았고, 몸을 일으켜서 세상을 밟았다. 춥다, 그리고 온 몸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나는 마주보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해?”
그렇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네는 나를 보며, 꼬마는 시선을 떼지 않는다. 그리고 꼬마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다가가서 꼬마를 품에 담았다. 너는, 서럽게도 울었다.
-아저씨는 바보에요.
아아, 그럴지도. 나는 그런 꼬마의 말에 대해 소리 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품에 안겨 우는 이 꼬마는 나의 속을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12.
“꼬마 네가 나한테 처음 얼굴을 들이민 게, 몇 년 전이더라.”
-아저씨가 24살 때요.
스물 네 살 때라, 재활이 완벽하게 끝났다고 했고, 프로 배구단에 스카우트 되었던 해였지. 그때 꽤나 나는 밝아질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후유증이 다시 찾아올 거라는 예상도 없었고, 나는 다시 내가 날기만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그날을 잊어버린 채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음, 그나저나 그 중간에 꼬마가 찾아왔다니, 뭔가 어색했다.
“뭔가, 계속 함께한 것만 같아서, 몇 년이 분명 짧지 않은 걸 알면서도 어색해.”
꼬마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13.
멀쩡한 귀신을 보는 일은 꽤나 드물다. 그래서 나는 꼬마를 처음 봤을 때 진짜 인간 꼬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생기와 선명함을 가진 꼬마를 전혀 귀신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꼬마는 처음에 나를 몰래 따라다녔었다. 대체 얼마나 몰래 따라다녔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꼬마를 진짜 살아있는 아이라고 처음에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기척을 숨겼을 가능성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돌아보니 그런 걸 물어 본 적이 없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꼬마는 결국 들켜서 나의 곁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나는 꼬마가 고아일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리고 같이 살까, 하며 집 주인에게 물어보면 될 거야, 라고 말 한 순간에,
-아저씨, 저 죽었는데요.
그렇게 고백해 온 것이다. 나는 꽤 놀랐지만, 받아들이는 데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여튼 우리는 같이 살기로 했으니까.
아 맞다, 아저씨란 호칭 말인데, 나는 처음에 형이라고 부르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꼬마는 정말로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포기해버렸다는 그런 이야기. 아, 내가 24살 젊은 나이부터, 지금도 젊은 데 계속 아저씨라고 불리고 있다니.
뭐, 딱히 불만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14.
나는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새해첫날부터 독감 확진이라니, 이게 뭐람.
15.
쇼요, 고마워.
예?
네가 있어줘서 다행이야.
그렇게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아버리는 카게야마를, 쇼요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그의 열이 뜨겁다. 쇼요는 눈을 감았다 떴다. 카게야마는 그냥 눈을 감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
쇼요는 열에 시달리는 카게야마를 안타까운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머리를 살짝 만져주었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게. 카게야마는 그런 쇼요의 손길을 알지 못한채로 쌕쌕거리며 자고 있다. 쇼요는 그가 남긴 말을 되씹었다.
나의 이기심이 아저씨를 고통에 빠뜨렸을지도 모르는데.
16.
쇼요가 대충 나를 먹여 살리고 간호해준 덕분에 금방 나을 수 있었다. 이제는 배구 시합에 나갈 수 있다. 한창 시즌 중인데 이게 뭐하는 짓이람. 저 저번 주에 미끄러져서 접질렸을 때에도 엄청 감독님께 깨졌었는데.
17.
-아저씨.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꿈에서 깨어나 눈을 떴는데, 주황색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악몽이라도 꿨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자는 모습이 딱 그렇게 보였던 걸까. 왜인지, 악몽이 오늘은 바로 흩어지지 않았다. 꿈이란 항상 눈을 뜨면 흩어져 버리는데. 지금은 아직 형체를 갖고 있다. 나는 그 악몽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응, 나 악몽을 꿨어. 네가 엄청 맞는 꿈이었어. 너는 울고 있었고 비명을 질렀어. 나는 되게 무서웠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진짜 악몽이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나를 보며, 꼬마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무척 졸렸다. 악몽 때문에 잠을 푹 자지 못했기 때문이려나. 지금 창밖도 무척 어두컴컴하고 말이다. 꼬마는 입을 열었다. 하암,
-아저씨, 때가 된 거 같아요.
무엇이? 그러나, 나는 묻지도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18.
요즘따라 왜이리 졸린 지 모르겠다. 이것도 후유증의 일종인가. 그냥 피로가 쌓인 걸까나. 꼬마의 표정도 요즘 그리 밝지 않아서 걱정이다. 요즘 날씨가 꽤 추워서 눈이 오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 날아다닐 줄 알았는데.
19.
-아저씨, 내가 내 이름을 알려줄까.
“비밀 이랬으면서?”
-내 이름은요, 히나타. 히나타야.
졸려서 감기던 나의 눈이 커졌다. 꼬마, 아니 히나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기억하냐는 듯이.
20.
비가 오던 날.
작은 아이가 골목길에 쓰러져 있다. 남자가 작은 아이를 밟고 또 찼다. 작은 아이는 비명을 지른다. 빗소리가 굵다. 남자는 아이를 각목으로 두들긴다. 작은 아이는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른다. 남자는 그런 아이의 입을 막을 생각도 없는 듯하다.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남자는 그 일방적인 폭력을 잠시 멈춘다. 작은 아이도 그 걸음을 들은 것은 마찬가지이고,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같은 비명을 마구 질러댄다. 남자는 그런 아이의 배를 발로 걷어찬다. 그리고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살핀다.
그리고 큰 아이가 젤 가까운 곳을 지나던 순간, 남자는 큰 아이의 허리를 걷어차 버린다. 큰 아이는 쓰러져서 바닥을 구른다.
남자는 큰 아이를 몇 번 패고는 큰 아이가 더 이상 꼼짝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꾹꾹 밟아 일어나지 말라는 무언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눈을 감기만 해봐……, 라는 유언의 말도.
큰 아이는 눈을 감고 싶었다. 꾹 감고 뜨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남자에 대한 공포가 너무나도 컸다. 아, 큰 아이는 작은 아이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눈을 뜬 채로 지켜봐야했다. 작은 아이는 처참하고 또 처참해진채로 너덜거리고 있다. 큰 아이는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 눈을 감고 싶다. 작은 아이의 눈이 더 이상 깜빡거리지 않는다. 작은 아이는 눈을 뜬 채로, 숨이 멎은 듯하다.
하하, 네가 그냥 지나치려하지 않고 신고라도 했다면, 이 아이는 죽지 않았을 텐데.
남자는 비열하게도 책임감을 큰 아이에게 모두 떠넘긴다. 큰 아이는 너무도 지쳤기에, 남자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미 옳고 그름을 파악할 능력은 상실되어버린 채다. 뜬 눈으로 죽어버린 작은 아이의 눈이 큰 아이를 바라보는 듯하다. 큰 아이는 그것이, 자신을 원망하는 눈이 아닐까 생각하고야 만다.
얘 이름이 뭔지 알려줄까?
큰 아이는 이미 모든 기력을 잃었지만, 남은 모든 기력을 다해 아주 약간,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남자는 큰 아이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한다. 큰 아이의 눈은 하염없이 앞만을 향하고 있다. 남자는 그런 큰아이를 발로 찼다. 그리고 다가와서 속삭인다.
히나타, 히나타야. 너가 죽인거야.
큰 아이는 이미 살아 있는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 듯한, 죽어버린 눈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21.
작은 아이는 어느 순간, 자신이 자유로워졌음을 안다. 온몸을 쑤시던 고통이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단 것을.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남자도 더 이상 보이지 않음을 깨달은 아이는 정말 오랜만에 기쁨에 가득 찰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 헛된 감정이라서, 아이는 자신의 몸을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몸은 너무나도 끔찍하게 망가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친다. 상황을 바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이는 너무나 어리다.
그리고 누군가가 발치에 채인다. 그 남자아이. 자신의 비명을 듣지 않고 지나쳐가려다가 엮어버린. 아이는 자신의 곁에 있는 유일한 사람을 흔든다. 그러나 반응이 없다. 주변을 둘러보니 깨어진 헤드폰이 보인다.
아, 일부러 무시한 것이 아니었어. 아이는 남자와 함께 남자아이를 원망하던 것을 후회한다. 그리고 조심스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며 말을 시작한다. 자신의 몸으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시야를 택해서.
안녕, 나는 히나타 쇼요야…
그러나 말에는, 답이 없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아이는 문득 공포에 질린다. 고개를 돌리자 아직도 그 끔찍한 모습의 자신이 그대로이다. 아이는 두려움에 가득 찬다.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아, 그리고 아이는 그 의심을 부정하려 했다.
내 목소리를 들어줘!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는다. 아무도 아이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
나를 봐줘!
그러나 아무도, 보지 않는다. 아이는 자신의 비명이 과연 울리고는 있는 것일까, 사실 아무도 듣지 않으니까, 나의 목소리란 더 이상 쓸모없지 않을까.
거기 아무도 없어?
그러나 아무도, 듣지 못한다. 아이는 공포에 질려 자신의 옆에 있는 유일한 이를 흔들고 또 흔들었다. 그리고 외친다. 내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나를 봐주세요, 일어나서 나를,
도와주세요.
22.
카게야마가 가득 공포에 찬 비명과, 모든 절망을 담은 원망과, 너무나도 간절한 외침을 들었을 때 죽어버린 히나타는 이미 카게야마의 곁을 떠나버렸지만, 그 외침은 이미 닿아버렸다.
카게야마는 그 순간부터 죽어버린 이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23.
나는 울고 있었다. 내가 잊은 것들과 기억하지 못한 것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나는 그래서, 울고 있었다.
아, 그래. 생각해보면 그렇다.
너는 너의 이름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너는 내가 비 오는 것 날을 특히 싫어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너는 단 한 번도 비 오는 날에 나가자고 한 적이 없었다.
네가 일찍 들어간 날이면 항상 내가 돌아가는 길에는 비가 왔다.
너는 너가 죽게 된 때를 말해 주지 않았다.
너는 너의 나이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죽은 나이가 언제인지 물었을 때, 너는 답지 않게 애교를 부려 상황을 무마해버렸지.
너는 내가 이따금 후유증에 시달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이 굴었다.
너는 나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날, 그저 기다리는 게 보통의 경우이었는데, 그날은 거의 죽어가는 나를 찾아왔다.
너는 내가 너의 기억을 거의 다 잊어버렸을 때에서야 나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너는 내가 어째서 자신을 볼 수 있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24.
“어째서, 말하지 않았어?”
나는 이것이 멍청한 질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당연히, 나라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듣고 싶었다. 꼬마, 아니 히나타의 입으로.
-그러면, 작별해야하니까.
히나타가 밝게 웃는다. 그 모습이 아스라하다. 나는 히나타의 손을 잡았다. 잡은 손에 힘을 준다. 히나타는 나를 살짝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다시 미소 짓는다.
-소용없어, 아저씨. 애초에 죽은 사람을 잡을 수 있다는 것부터 이상하잖아?
나는 어떤 말을 꺼내야할 줄을 몰랐다. 히나타는 미소 짓고 있는데도, 어째서인지 슬퍼보였다.
-형이라고 한번, 부르고 싶었는데.
나는 너무 꼬마다운 작별 인사에, 이것이 정말로 마지막임을 잊고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부르지 그랬어.
-그리고 히나타라고 불리고 싶었어.
그래, 히나타. 나는 미소 지었다. 히나타가 더욱 환하게 웃는다. 그 미소가 너무나도 환해서 나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히나타는 정말로, 이 빛나는 아이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어서, 나는 몇 번이고 그것을 불러주고 싶었지만, 기회는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저씨, 고마워!
햇살 같이 환하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히나타. 히나타는 점점 흩어지듯이, 옅어져갔다.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닿지 않는다. 히나타는 옅어지고 또 옅어져 결국 사라져버렸다. 나는 황망한 마음으로 히나타가 있던 자리로 달려갔다. 그러나 귀신이란 존재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이었는지 어떤 흔적도 기운도 느낄 수도 찾을 수도 없었다. 나는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 안았다. 계속 저주해왔던 이 ‘눈’이, 이렇게 간절해질 줄이야.
아, 히나타. 히나타. 히나타.
나는 계속 히나타를 중얼거렸다. 그 이름이 입에서 발음되는 순간순간들이 저릿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사라진 히나타를 부르던 나의 볼과 턱을 눈물이 타고 흘렀다. 그리고 눈물은 하염없이 쏟아졌다.
가엾고 또 가여운 그 아이와의 마지막이, 언제나 짓던 햇살 같은 미소였다는 것이 나는 너무나 가슴 아팠던 것이다.
아, 안녕. 히나타.
25.
그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죽은 존재를 보는 일이 없었다. 이따금 그 아이와의 시간과 그 모든 것을 봐야만 하던 십년에 가까운 시간들을 증명할 무언가도 없음을 상기하게 되는 순간일 때면, 그 모든 것들이 허상이나 꿈에서 비롯된 나의 거짓된 상상은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시간들이 환상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 햇살같이 환한, 밝은 미소는 내 머릿속에서 상상해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남은 자의 삶을 살아갔다.
1. 히나타가 죽은 나이는 8살 무렵입니다만, 죽은 뒤 몇년간 홀로 떠돌았기 때문에 어느정도 성숙한 면이 있습니다.
2. 카게야마는 여전히 천재 세터. 프로리그에서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팬층이 두터우며 실력도 최고이지만, 몸이 자주 아프다는 게 단점으로 꼽힙니다.
3. 그 '남자'는 아직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4. 사실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주변을 꾸준히 맴돌았고, 카게야마가 24살 때 일부러 들킨 것입니다.
5. 카게야마는 혼자 큰 집에서 삽니다. 꽤나 재산이 있으니까요. 사실 히나타가 24살 때 카게야마의 앞에 나타난 것은 카게야마가 그 해에 큰 집으로 이사갔기 때문일지도(...). 물론 그 전에도 자취했습니다.
6. 사실 둘의 나이 차(현재 외관상 20살 차이) 때문에 커플링으로서의 느낌을 별로 주려고 하진 않았습니다만, 어쩌다가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뭐 원래는 10살 차이니까요(?)
7. 제목은 그냥 생각 나는 게 없어서 막 정했습니다.
8. 원래 카게야마의 직업은 군인이었습니다만, 그냥 배구가 쉬울 거 같아서 배구로 했습니다. 다음에 꼭 군복 입은 카게야마를 써보겠다는 다짐을 하며.
9. 카게야마의 생일(12월 22일)에서 알 수 있 듯이, 그날은 겨울방학이 다가올 무렵이었고 카게야마는 그 뒤로 고2 학교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폐인처럼 지냈어요.
카게야마는 겨울을 좋아했다. 왜냐하면 카게야마는 눈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 고요함을 머금은 눈을 저벅거리며 걸으면 카게야마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오늘도 그렇게 눈길을 걷는 중이었다. 자신이 남긴 발자국들을 보기 위해 땅을 바라보며 걷는 중이었다. 뽀드득 뽀드득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그러던 중이었다.
'산타 선물 신청서'
그런 문구가 젤 위에 적혀있는 빨강색 종이였다. 글씨는 초록색이라 별로 잘 어울리지 않고 촌스러웠다. 그게 눈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이었다. 뭐지 이게? 카게야마는 그것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날의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그것을 꺼내보았다.
그것에는 이름과 나이와 선물, 주소를 적는 칸이 있었고, 맨 마지막에는 적으면 자동으로 본부에 전달됩니다라는 글과 함께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달하는 산타 클로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나이를 적는 칸에는 어른과 청소년 신청 불가, 어린이(만 13세 이하) 만 가능(그 이상이실 경우 본부는 접수하지 않습니다) 문구가 옆에 적혀 있었다. 물론 카게야마는 성인이었다. 체육 전형으로 들어간 대학의 대학생. 그리고 선물에는 너무 비쌀 경우 본부에서 자금 부족으로 접수하지 못합니다, 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카게야마는 에이, 하면서 괜히 아쉬워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뒤가 크리스마스였다. 산타가 크리스마스 밤에 오던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오던가. 카게야마는 헷갈렸다. 아마 크리스마스 날에 오지 않으려나? 뭐야, 그럼 산타는 크리스마스 날에 못 쉬네. 라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물론 산타는, 이브에 찾아오는 존재였다.
카게야마는 호기심과 궁금함으로 그 카드의 칸을 채워나갔다. 나이는 물론 속였다. 속여도 전달되려나, 하면서 10살이라고 적어 넣었다. 물론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애초에 진짜 오지도 않을 텐데. 카게야마는 무심하게 써내려갔고, 그리고 그것을 어딘가에 치워버렸다.
-
히나타는 산타였다. 그러니까, 진짜로 직업이 산타라는 말이다. 일 년에 딱 한번 일하기는 하는데, 한번 일해도 꽤나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어서 계속 해온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 하루의 일의 양이 어마어마하긴 했지만. 히나타는 지금 몹시 시들어가고 있었다. 고속으로 달리는 루돌프 뿔로 만든 썰매 비슷하게 생긴 이동수단이 지금 고장 났기 때문이었다. 아 젠장, 망했다. 오늘 밤부터 일해야 하는데. 그렇다. 오늘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였던 것이다.
"아 망했다. 이걸 수리 맡길 수도 없고."
이게 뭐고, 뭐하는 분이세요? 라는 질문이 들어올까 봐, 라고 생각했지만 곧 이런 걸 고칠 수 있는 전문적인 곳 자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랬지. 난 어떡하지 이제. 히나타는 노는 일 년 내내 썰매에 관심 한번 가져주지 않은 자신을 계속 원망했다. 멍청이, 한 번도 안 쓰니까 이렇게 망가지지!
어떡하지, 이렇게 꼼짝없이 일을 째게 되는 건가.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깨고 마는 것인가. 아아, 일 년간 살 돈은 어떻게 구하지. 이제 막 알바 구하러 다니고 그래야하는 거야!? 나 막 이거 잘리는 건 아니겠지, 하루 힘들긴 한데 이런 일자리 잘 없는데.
히나타는 정말로 절망에 빠져 멍때렸다.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히나타는 조급한 마음과 짜증과 걱정에 발로 썰매를 쾅쾅 잤다. 그 순간이었다. 덜컹덜컹, 드릉드릉, 썰매에 시동이 걸렸다. 히나타는 기쁨에 가득 찬 얼굴로 주 예수를 외쳤다. 물론 히나타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제야 맘이 놓은 히나타는 아이들 목록을 확인하고 선물 목록과 본부에서 준비해 내려온 선물들을 대조해보며 수량을 체크했다. 어제 하긴 했지만 작년에 수량이 하나 부족했던 경험이 있어서, 다 일일이 한 번 더 체크해야 맘이 놓였다. 그러던 중에 문자 알람이 울렸다.
'히나타, 내일 볼래?'
카게야마였다. 히나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곧 고된 일을 시작해야한다는 그런 걱정 같은 건 그 문자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지워져버리고 없었다.
-
히나타가 고된 일을 다 끝낸, 아니 끝냈다고 생각한 것은 새벽 3시 23분 무렵이었다. 한 번 더 빼먹은 게 있는지 체크해 볼까, 하면서 고속으로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썰매의 속도를 늦추고 목록을 뒤졌다. 기계적으로 목록을 넘기던 히나타가 펼친 것은 존재하지 않는 신분이라고 누락된 카드 목록이었다.
헐 미친, 히나타는 놀라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카게야마 토비오?
물론 자신이 아는 카게야마는 23살이었고 이 목록에서는 10살이라고 되어있지만, 나이를 틀리게 적어서 누락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주소도 자기가 아는 그 카게야마의 주소였다. 내일 놀러가기로 했는데, 그 집에 토비오가 더 있을 리도 없잖아? 얘가 어쩌다가 그걸 보낸 거지. 그나저나 선물은 뭐라고 적었을까…, 히나타는 아무 생각 없이 선물 칸으로 시선을 내렸다.
세상에.
히나타는 입을 떡 벌리고 썰매의 목적지를 카게야마의 집으로 바꿨다. 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뭐 어떤가! 와 미친! 히나타는 자기가 본 게 꿈이 아닌가 계속 생각했다. 그렇지만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산타 계약 조건 중 정체를 까서는 안된다는 조항 같은 건, 지금 히나타의 머릿속에서 존재할 공간이 없었다. 히나타의 시야에 카게야마의 집이 눈 앞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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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야마는 히나타가 그런 밤을 지내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별로 안 좋은 꿈을 꾸는 지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아니, 원래 인상이 안 좋았나. 여튼 자는 얼굴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세상모르고 자는 중이었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자꾸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으음, 소리를 내며 이불을 고쳐 덮고 다시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숨기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그래, 산타였다. 산타의 복장을 입고 있는 듯했다. 산타는 정말로 있는 모양이었다. 산타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오는 거였구나. 카게야마는 졸린 눈을 비볐다. 그리고 흐릿하던 실루엣이… 분명해졌다.
어?
"…히나타……?"
그리고 정말, 자신의 선물이 도착했음을 깨닫기 전까지 카게야마는 몇 초간 눈만 깜빡 거렸다. 그것이 환상이나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또 확신하게 된 순간, 카게야마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달려가서 그를 꽉 안았다. 그의 얼굴이 자신의 품에 묻히도록 했다.
카게야마는 지금 오이카와와 함께 도서관에 있었다. 카게야마는 정말로, 진심으로 이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이사람, 나를 아주 제대로 놀려먹고 있어! 카게야마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오이카와에게 눈초리를 흘겼다. 카게야마는 선배니까, 선배니까 하면서 참는 중이었지만 싫은 티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정말로, 이 선배한테서 벗어나고 싶었다.
"...도서관인데 조용히 해주시죠."
"그렇지만, 너무, 웃겨서, 하, 하하,"
오이카와는 정말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정말로 짜증이 난 모양인지 눈을 꾹 감고 인상을 찌푸렸다. 문제는, 그 표정이 또 웃기다고 오이카와가 웃음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도서관 사서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서 조용히 좀 해주세요, 라고 하고나서야 오이카와의 웃음이 멎었다.
"제가 조용히 해 달라 했을 때는 전혀 안 들으시더니."
"그지만 그렇게 말하는 토비오쨩 모습도 웃겨서 전혀 안 멈춰진다고."
"저를 자꾸 웃음거리 취급하지 말아주세요."
그 말에 오이카와는 또 웃음을 터뜨리려고 했다. 카게야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이카와는 간신히 입 박으로 새어나오는 소리를 삼키고 얼굴에 가득 미소를 띠운 채로 말을 이었다.
"웃음거리라는 말도 알아?"
아, 정말! 카게야마는 도망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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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의 시작은 그래, 카게야마는 과제를 해야 했고, 그저 도서관에 들러 자료를 찾아보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어떤 책을 찾아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같은 학교에서 적어놓은 메모를 들고 한참을 헤매던 중이었다. 그리고 한참 맨 윗칸을 훑어보며 옆으로 걸어가던 도중에,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 어?"
"어?"
그리고, 그 누군가가 오이카와 토오루였을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오이카와상."
카게야마는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오이카와는 미소 가득한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그런 오이카와를 슬쩍 보고는 그냥 지나쳐 갈 생각인 것인지 오이카와의 반대쪽으로 걸어 나갔다.
"앗, 나를 보고 그냥 가려하다니, 너무해!"
"제가 과제를 해야 해서요. 죄송하지만 오늘은 곤란…"
그러면서 슬쩍 멀어지려는 카게야마였지만, 오이카와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카게야마의 어깨를 잡았다. 그 탓에 당황한 카게야마는 말을 멈춘 채로 놀란 눈을 하며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런 거라면 오이카와상이 도와줄게,"
오이카와는 무척 기분 좋다는 얼굴이었다. 카게야마와 완전히 반대였다. 카게야마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보다 약간, 키가 큰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리고 카게야마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 괜찮은데요."
거절이었다. 그렇지만, 카게야마의 거절은 안타깝게도, 오이카와에게 전혀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좋아! 이 오이카와상의 머리로 가엾고 멍청한 후배님을 구제해주지!"
오이카와는 눈을 번뜩였다. 그 앞에 서있는 카게야마의 표정 따위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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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토비오쨩이랑 도서관이라니 너무 안 어울리는 걸!"
"그래서요."
"아, 너무해."
"그래서요."
둘은 이렇게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면서, 둘은 일단 과제에 관련된 책을 찾았다. 둘의 키가 커서 쉽게 맨 끝 칸에 손이 닿았기에 딱히 뭐가 불편한 건 없었다.
"아, 내가 이렇게 키가 큰데 토비오쨩도 왜 이렇게 귀염성 없이 키가 큰 거야?"
"제 키가 뭘 잘못했습니까?"
"찾는 책에 손이 닿지 않아 낑낑거리는 후배를 보며 내가 꺼내줄게, 하면서 그 뒤에서 큰 손으로 후배가 찾는 책을 뽑아주는 그런 판타지를 실현하지 못한다는 죄?"
"…."
카게야마는 이쯤 되면 무시가 제일 좋은 선택이 아닐까 고민했다. 그리고 책을 찾는 일에 집중하기로 결론 내렸다.
"이거 맞죠?"
"아닌데? 이거는 화학 관련이고, 우리가 찾는 건 물리학 관련 분야잖아."
그러면서 오이카와는 그것이 아닌 이유를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분명 카게야마의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엄청 조잘대는 것은 오이카와 쪽임에도, 어째서인지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몇 배로 더 잘 찾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괜히 승부욕을 불태웠다. 그렇지만 오이카와는 그런 카게야마를 비웃듯이 아주 쉽게 찾아내서 가져왔다.
"…선배, 혹시 관련 없는 거 뽑으신 거 아니죠?"
"하, 나는 귀염성 없으신 이 후배님과 다르게도 머리가 좋아서 그럴 일이 없답니다."
말을 말자.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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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경쟁심을 불태우며(물론 내기였다면 카게야마의 일방적 패배겠지만) 과제와 관련 있는 책을 정말로 많이도 찾아냈지만, 대출 한도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이제 카게야마는 젤 연관성 있는 책을 찾아야 했다. 오이카와는 당연히 내가 도와주지! 라며 의지를 불태웠으니 카게야마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거를 같이 찾아주겠다는거지, 선배가. 이쯤 되면 가실 시간도 되지 않, 까지 카게야마가 생각한 순간이었다.
"오늘 시간 아주 여유로운 김에 도서관에서 마음의 양식이라도 섭취해볼까~ 하며 온 거니까, 이제 가실 시간 된 거 아닙니까? 하는 말은 꺼내지 말아줘,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
"이게 더 낫지 않습니까?"
"음, 카게야마, 너 에너지 보존의 법칙도 모르지, 사실?"
"모르면 안 됩니까?"
"토비오쨩, 아하하, 왜 이렇게 당당한 거야!"
그리고 웃음을 터뜨린다.
이렇게, 오이카와의 여러 번의 웃음과 카게야마의 말없는 짜증을 거쳐, 이 상황에 오게 된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정말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도망칠 수는 없지 않은가. 카게야마는 열을 내며 없는 머리로 열심히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때였다.
"토비오쨩, 지금 무지 머리 아프지?"
"네."
"잠만 기다려봐."
그리고 열람실 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카게야마는 그런 오이카와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도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데."
카게야마가 어떻게 그것을 전달할지 깊은 고민에 빠져있을 무렵, 누군가가 카게야마의 등을 툭툭 쳤다. 카게야마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황급히 돌렸다. 당연하게도(?) 그 누군가는 오이카와였다. 카게야마는 놀래키지 마세요! 라고 소리 지르려다 겨우 입을 다물었다. 오이카와가 그런 카게야마를 보면 의아한 표정을 짓다, 이내 웃으며 말을 건네었다.
"뭐야, 그 멍청한 표정은? 토비오쨩, 여기."
오이카와가 건넨 것은 일회용 컵에든 따뜻한 우유였다. 1층 자판기에서 뽑아온 모양이었다. 카게야마는 놀란 눈으로 그것을 받았다. 꽤나 뜨거웠지만 카게야마는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마셨다. 살짝 단 맛도 느껴졌다. 카게야마는 호호 컵을 불며 우유를 마셨다. 오이카와는 본인 몫으로는 캔커피를 들고 온 모양이었다. 그는 그것을 홀짝거리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자, 다 마시고 나면 계속 해보자!"
따뜻한 우유를 마시며 카게야마는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오이카와는 그런 카게야마를 보지 않는 척 하며 시야 끝에 담았다. 그리고는 창밖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기분 좋은 듯 한 미소로 얼굴을 가득 채웠다. 창밖의 하늘이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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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주말이라 열람실의 문은 꽤나 일찍 닫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리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이제 곧 문 닫을 시간이에요, 라는 사서의 말에 급히 책을 대출했다. 그리고 문을 닫은 열람실을 나오며 카게야마는 빌린 책을 한 아름 품에 안은 채였다. 그것이 꽤나 위태로워보여서 오이카와는 시선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계속 궁금했는데 말이야,"
"예?"
"그 가방은 장식이야?
"…넣으려고 했습니다."
오이카와가 이제는 밖이라고 전혀 참을 생각도 없는 듯, 큰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생각 못한 게 아니고?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오이카와는 더욱 더 크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가방을 열었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가 들고 있던 책을 대신 들어주었다. 카게야마는 그런 오이카와를 보며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오이카와는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서 눈을 떼고 책을 하나하나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래서, 오늘 어땠어? 좋았어?"
책을 막 가방에 다 넣고 가방을 똑바로 맨 카게야마를 보며 오이카와가 물었다. 어느덧 시간은 노을이 붉게 물들 무렵이었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한순간 붉어졌다. 그런 카게야마를 보는 오이카와의 얼굴은 기분 좋은 미소로 가득했다. 카게야마는 그런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며 손을 들었다. 어느덧 둘의 거리가 좀 생겨 있었다. 카게야마는 손을 흔들었다. 잘가요, 오이카와상.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