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시라 조각(161223)

뱀파이어 시라부


1.
아, 목말라. 

시라부는 고된 연습에 지쳐서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갈증이 났다. 시라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옆에 있는 물통의 뚜껑을 거칠게 열고는 거의 털어넣듯이 물을 입에 들이부어 삼켰다. 그래도 목이 마르다. 시라부는 이 감각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땀냄새에도 가려지지 않는 인간의 향이 끼쳐왔다. 시라부는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 누군가를 보고 말았다. 세미, 그 누군가는 세미였다. 그것도 엄청 당황한 표정의.

"시, 시라부 너, 눈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반대로 돌린 시라부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망했다. 한순간 표정이 일그러졌다. 오늘따라 상태가 별로더니, 이렇게 되어버릴 줄 알았으면 아프다고 부활동에 나오지 말 걸. 시라부의 입술이 깨물렸다. 그리고 놀란 듯한 세미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라부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정말로 한 순간에 불과했다.

"아, 들켰네요."

그 눈빛이 덤덤하기만 해서, 세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2.
"제가 뭘 해야하는 겁니까?"

짜증스런 말투다. 세미는 사태의 심각성을 자기만 느끼고 있는 것인가 하고 고민했다. 이 깜찍하지 못한 후배님이 적반하장으로 나오니 더욱 더. 어... 그거? 라고 말했을 때 고개를 당당하게 끄덕이는 시라부에 세미는 지금 얘가 장난치나 생각하다가, 입술 사이로 보이는 그 송곳니에 뱀파이어라는 게 자기 눈앞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아니, 지금 너 나한테 비밀을 들킨 거잖아?"

그런데 지금 시라부는 어쩌라고요, 라는 태도를 일관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제가 그게 맞다는 데 어쩌시려는 건가요? 라는 눈빛에 세미는 정말로 시라부를 한대 쥐어박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지만 그런 건 좋지 않은 해결책이겠지, 금방 그 충동을 정리한 세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건넨다.

"그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

침묵이다. 정작 중요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시답잖은 말에 말꼬리를 잡으며 늘어진다. 세미는 솟아오르는 짜증을 견디기 힘들었다. 시라부는 입술을 꾹 누르며 불만가득한 눈빛으로 세미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굴렸다.

3.
시라부는 세미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부탁이라고 했다. 세미는 먼저 고개를 숙이는 시라부가 낯설었다. 

음력 보름이 되면, 저를 좀 가둬주세요.

꽤나 까다로운 부탁이었다. 세미는 지금까지는 어떻게 해서건 기숙사를 빼고 집으로 돌아갔다던 시라부를 보며 왜 기숙사 학교에 들어온 거냐고 물었다. 시라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생략된 답을 세미는 알아듣고 말았다.

아 맞아, 너 어느날에는 어떻게 해서건 집에 가고는 했지. 대충 한달에 한번 정도였나?
아니요, 일부러 의심 안받으려고 중간중간에도 그랬었거든요.
그런 걸 의심하는 사람의 상상력이 놀랍네.
...

시라부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것일까. 세미는 그런 시라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럼 계획을 짜야겠네, 어떻게 해줄까? 세미는 그 간절함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라부는 표정의 변화를 주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지만, 세미에게는 기뻐하는 그 낯빛이 읽혔다.

4.
야, 시라부. 정말 이렇게 나올거야? 내가 다른 이들한테 다 말해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
세미상, 어차피 믿어주지 않을텐데, 미친 놈 취급받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아, 그때 나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살짝 비웃음이 섞인 웃음을 짓던 시라부.

그것은 이것 때문이었구나. 세미는 지금 너무, 마음이 아팠다. 시라부. 시라부는 정말로 강한 척하는 여린 아이일 뿐이었다. 세미는 고개를 돌렸다. 시라부가 무너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괜찮아. 
....뭐가요.
내가 있잖아.

시라부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5.
시라부! 시라부!
저리가요! 저리 가라고요!
미안, 미안해...
세미상이 뭐가 미안한데요!

시라부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목소리가 찢어진 듯 갈라진 채로 뱉어져나왔다. 시라부는 울고 있지 않았다. 세미는 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울고 있다면 그냥 위로해 줄 텐데, 그러나 시라부는 강한 척하는 것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아, 너의 눈이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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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주우려고?'

스가와라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발치에 닿아 멈춘 공을 주워 자신의 품에 가져갔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가와라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젓는다. 카게야마는 그런 스가와라를 바라보며, 그 얼굴을 향해 멍하니 시선을 두었다. 

어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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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그래서가 아니라-"
"간만에 혼자하는 연습을 방해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카게야마는 공을 자신에게 떠맡기듯 건넨 채로 돌아선 스가와라를 쫓아 달려갔다. 그를 따라잡는 데는 두발자국이면 충분했다. 팔목이 붙잡힌 스가와라는 의문에 찬 표정으로 카게야마의 눈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의 눈에 스가와라의 눈이 담겼다. 아, 그 눈이 너무나도- 

"스가 선배, 좋아해요."

아름답다. 물론 그것 뿐은 아니라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입술 밖으로 토해낸 말은 생각보다 무게가 있어서, 그 무게에 두려워진 카게야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스가와라의 갈색눈이 놀란 듯이 커져 깜빡거렸다.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시간은 왜이리 느린 걸까, 만약 체육관에 시계가 있었다면 마치 초침이 한번 움직이는 소리가 일년과도 같이 길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시간은 고무줄과 같아서, 힘껏 늘리면 처음에는 그저 계속 늘어날 뿐이지만-

"미안, 카게야마."

한도가 되면 순식간에 반대로 튕기며 쪼그라든다. 그 다음을 두려워하여 시간을 늘여버린 이는, 더욱 더 강한 고통을 맞이해야하는 것이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되지 않는다. 반면에 스가와라는 한결같은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시간을 늘여버린 탓에 이런 고통을 느끼는 거라고 치부하려고 했다. 아, 아니다, 아니야. 카게야마는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그는 그 순간 스가의 빛에 홀려서, 어떻게 되든 좋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자신의 마음이 결코 그정도로 순수하지고, 깨끗하지도 않음을 알았다. 스가와라는 어느새 힘에 풀린 카게야마의 두손을 뿌리치고, 체육관 밖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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