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시라] 닫힌 부실과, 어느 우울
이 글은 반들반들한떡(@dduck_bandeul)님이 주신 썰을 기반으로 쓰여졌습니다.
져가는 석양이 체육관에 스몄다. 시라부는 공을 양손으로 받치다가 한 손을 빼고 들어 쥐었다가 다시 펴보았다. 이 손이 어떤 손이던가. 나의 빛나는 에이스에게 공을 올리는 손이었다. 봐, 내 에이스!를 속으로 외치며 코트 위에서 나의 에이스에게 토스를 올릴 수 있다는 그 사실은, 시라부에게 큰 자부심이었다. 당신이 빛나기를. 그것은 시라부의 가슴 속을 언제나 충만하게 해주는 사실이었다. 시라부는 자신이 그에게 토스를 올리게 된 그날, 그 순간부터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는 했었다. 그렇지만 오늘따라, 그럴 수가 없었다. 시라부는 손을 내렸다. 그와 함께 공이 체육관 바닥에 툭, 떨어져내렸다.
음료라도 마실까, 하고 나온 길에 보인 것은 익숙하고도 우직한 뒷모습. 시라부는 그 뒷모습을 우시지마 상이다, 하는 마음으로 반갑게 달려가려 하였으나,
“너는 길을 잘못 들었다, 오이카와.”
....오이카와, 토오루. 시라부는 급히 몸을 돌려서, 둘 중 누구도 자신을 보지 못했기만을 바랐다. 시라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시라부에게는 야속하게도, 우시지마의 시선은 언제나 그를 향하고 있었다. 나로는 안돼는 걸까. 내가 어떤 생각으로 그에게 토스를 올리는데, 그래도 안되는 것일까. 물론 시라부는 오이카와가 우수하디 우수한 세터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왜인지,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 울컥하는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 건가.
그 생각만이 시라부의 머릿속에 빙빙 맴돌았다. 시라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경기 중이 아니라 자신의 무너진 멘탈이 시합의 승패를 가른다거나 하는 끔찍한 일은 없어 다행이라고, 시라부는 생각했다. 지금 이 상태라면 최악, 최악일 것이다. 정말로. 시라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만 같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거란 말인가, 지워버리고 싶다. 시라부는 그 질척거리는 생각의 늪에 빠져 어지러웠다.
마지막 마무리 연습이었다. 보통 이 무렵에는 가볍게 몸을 풀고 오늘따라 되지 않았던 것들을 점검해보고, 부원들끼리 가볍게 이야기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꽤나 여유롭고 편안한 일과라고 할 수 있었다. 지친 몸을 그저 눕혀 쉬이는 것보다 이 쪽이 더 좋다고 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세미는 굴러온 공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올렸다. 시라부가 놓친 공이다. 시라부는 보통 이 일과 중이면 세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토스, 점검, 그리고는 둘만의 대화. 세미는 꽤나 그것이 고착화된 일과라고 여겼는데, 오늘만큼은 아니었던 것이다. 시라부는 저기 멀리서 혼자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미는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기지 않았다. 그러면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라부의 표정은 꽤나 어두워보여서, 세미는 섣불리 무슨 일이냐고 묻기 망설여졌다. 그렇지만 영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는 걸까. 세미는 주운 공을 들어, 시라부에게 던졌다. 시라부가 그를 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잠깐, 이었다. 세미는 잠깐의 스쳐지나간 시선을 그저 붙잡고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따금 나는, 너가 조금은 나에게 털어놔줬으면 좋겠어, 시라부. 세미는 들리지 않을 말을 속삭였다. 그것은, 연인에게 하는 속삭임이었다. 석양이 타오르고 있었다. 세미는 창밖을 힐끗 보았다. 마지막 불꽃이다. 곧 해가 질 것이다. 그리고 부실의 문이 닫히고, 체육관의 문이 닫히고- 너의 눈도 감기겠지. 그전에 세미는, 시라부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세미는 공을 띄웠다. 공이 날아올랐다.
석양은 짧은 순간의 불빛. 이미 체육관을 채우는 빛 중에 햇빛은 없었다. 시라부는 부실에서 대충 정리하고 나온 뒤에, 무언가 허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무엇을 챙기려 했더라, 뭔가 오늘따라 허전한 게 있는데. 시라부는 자신이 상태가 안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아, 그냥 가자. 그렇게 숨을 뱉어낸 순간이었다. 누군가 시라부의 팔목을 붙잡았다. 시라부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세미상."
세미, 그가 시라부를 보고 있었다. 나 좀 보자, 하고 시라부는 그 손길에 끌려가듯 방금 막 나온 부실 안으로 들어가야했다. 시라부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세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화난 게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으나, 곧 세미의 그 눈과 자신의 눈이 마주치자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저 눈 안에 서린 것은, 걱정이었다. 시라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내려 숙였다.
"무슨 일 있어? 애인한테도 얘기 안해줄건 아니지?"
장난스레 웃는 듯한 그런 말에는,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말해보라는 다정한 뜻이 섞여있었으리라. 그 뜻조차도 너무 상냥하여, 시라부는 어떻게 말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아뇨, 그냥- 시라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손이 눈이 들어왔다. 세미의 손. 그 손은 오늘 스쳐지나가듯 보았던 타팀의 세터처럼, 자유자재로 스파이커들을 활용할 수 있는 손이었다. 자신의 손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주려던 시라부는,
"지금... 울어?"
세미가 물어오자 자신의 눈가에 눈물이 잔뜩 고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부름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든 시라부, 그리고 시라부를 바라보던 세미의 눈이 마주쳤다. 시라부는 좀전까지 하던 생각에서 좀체 자신을 헤어나오게 할 수가 없었다. 다정한 선배, 그리고 나보다도 사실 더 실력 자체는 뛰어나다고들, 다른 많은 이들이 그랬었는데. 시라부는 우울의 극에 닿아 있었다. 그것과 그 생각의 거리는 무척 가까워서, 결국 시라부는 그 생각에 닿아버렸다.
그렇다면, 나는 그냥- 소모품인가?
그 순간 마주치고 있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시라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저, 쏟아내기 시작했다. 세미는 그런 시라부를 보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무엇으로 달래야하나. 세미는 시라부에게 손을 뻗어 입을 열려다가 일순간 멈추었다. 세미는 시라부가 어째서 우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세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시라부를 자연스레 품에 안았다. 시라부는 멍하니, 울고 있었다. 허공을 응시하면서. 세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시선에 자신을 맞추었다. 너는 나를 보고 우는 거야, 그런 거였으려나. 세미는 괜찮아, 괜찮아, 울지말고 천천히 이야기해- 이런 말들을 시라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알 수 없는 울음에 향하는 손길은 정말로, 따뜻했다.
시라부는 그래서 울음을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쉽게 멎지 않았고, 세미는 그런 시라부를 더 따뜻하게 안아주며 토닥였다. 이런 얘기를 해도 괜찮을까? 괜찮으려나. 그렇지만 세미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입을 열어야할 것만 같았다. 시라부, 무슨 일이야? 말해봐, 괜찮아, 괜찮으니까. 울면 그 얼굴 다 망가진다구. 그래도 나는 좋지만. 시라부, 시라부? 듣고 있어? 시라부는 그저 듣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떴다. 울음이 점점 멎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떼었다.
"세미상, 그게.."
세미는 그말을 듣고 시라부를 품에서 풀어주었다. 시라부는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 품에서는 말들이 잘 나올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울고 난 뒤의 히끅거리는 소리와 너무 울어서 어지러워진 머리탓에, 자신도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래도 시라부는 세미의 눈을 보며 이야기를 애써 풀어나갔다. 다정한 눈, 내가 비치는 눈. 그 눈이 지금 다른 쪽으로 물들고만 있는 것 같았다. 시라부는 입을 멈추었다. 더 이상 말하면 안될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무슨 소리를 한거지, 세미상 앞에서.
"어, 시라부... 그래서 이야기는 다 끝난 거야?"
세미는 시라부의 눈을 보았다. 입을 다문 시라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세미는 그 이야기를 대충이나마 알아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구체화도 시켰다. 그렇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쩔 수가 없었다. 연인이 울면서 토해내듯 말한 이야기라도 속이 체할 것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3학년 비주전. 너는 주전 세터. 감독님에게 인정받는 건 결국 너인데, 너가 그렇게 울면 나는 뭐가 되는 거야. 세미는 그런 생각이 치솟아 어찌할 수 없었다. 울먹거리는 눈의 시라부를 보면 아예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 세미는 입술을 씹었다.
"그, 선배, 제가 한 얘기는 그냥-"
시라부는 굳어있는 표정의 세미를 바라보면서 어찌해야할지 몰랐다. 뭐지, 내가 잘못한건가. 시라부는 그러나 말을 끝내지 못했다.
"난 그냥 이런 존재야?"
"예?"
세미가 그렇게 말을 해왔기 때문이다. 세미의 눈은 화, 라기 보단 질투를 더 담지 않았을까. 질투라, 그것은 욕정을 안은 감정이었지.
"항상 너는 우시지마 얘기밖에 하질 않아. 우리가 사귀는 거 아니었어? 이거 완전, 그냥 아는 선배한테 애정 상담하는 것 같잖아. 너가 짝사랑하는 상대가 남한테 고백했다고 울면서 달려온 것 같잖아. 아니야?"
시라부는 멍하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그저, 나의 이손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모르겠어서, 울었을 뿐인데. 시라부는 손을 보았다. 이번엔 그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세미를 보았다.
"네..? 세미상,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말 틀려? 가끔은 너가 누구랑 사귀는 건지 헷갈다고. 나 아니였어? 아니면 우시지마랑 사귀고 있나? 나는 그냥 고민상담 상대인가? 너가 나한테 말해오는 걸 생각해봐. 오늘 우시지마 상이, 방금 우시지마상이, 아아- 우시지마상! 우지마상!"
세미는 쏟아냈다. 말을 입 밖으로 쏟아냈다. 그것은 본디 쌓여있던 감정이 기폭제를 만나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꽤나 깊은 질투, 열등감. 세미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흠칫했지만, 멈출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답을 들어야겠어, 시라부. 세미는 시라부의 눈을 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 황당하다는 눈, 그리고 떨리고 있는 눈.
"우시지마상은 그저 동경하는 에이스일 뿐이라고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이나고, 딱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라부는 그렇게 떨리는 눈으로 소리쳤다. 본디 시라부는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덜덜 떨 아이는 아니었던 까닭이다. 세미는 허, 입의 허공을 혀로 차내었다. 시라부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울음으로 차갑게 식었던 그들의 분위기가, 이제는 뜨거웠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맨날 너가 이야기 하는 게 그거잖아? 틀려? 틀리냐고!"
".....하지만...."
시라부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회상해보라, 시라부는 분명 그랬다. 세미상은 그걸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며 받아주었지. 시라부는 그것이 그저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었는데. 시라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시라부? 그 부름에 시라부는 세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아, 상처받은 눈이다. 상처받은 눈이야. 미안해요, 미안해. 시라부는 결국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입안에서 차마 뱉어내지 못한 채.
그때, 시라부의 턱이 잡혔다. 세미의 손이였다. 세미는 그대로 입술을 맞춰왔다. 시라부의 눈이 커졌다. 세미의 손은 거칠게 시라부를 잡았지만, 그의 입술의 온기는 너무 다정했고, 그 입맞춤도 따뜻했고, 자신의 입 안을 훑는 혀도 너무 다정하기 그지없어서, 시라부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요, 미안해... 시라부는 그 입맞춤 속에서 뱉어질 수 없는 말들을 속으로 몇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세미는 숨을 뱉어냈다. 꽤나 긴 시간이었다. 시라부는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세미를 보았다. 둘다 호흡을 거칠게 뱉어냈다. 정말로 깊은 입맞춤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시작. 이대로... 세미는 말을 흘렸다. 시라부는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황급한 눈이다. 지금 엉망진창인데, 나. 괜찮아요? 그 말에 세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시라부는, 옷의 단추를 풀었다. 다시 세미는 시라부에게 손을 뻗었다. 부실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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