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흑] 옅은 하늘빛 향
*이글은 라기(@yhj2786)님의 리퀘로 쓰여졌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닿지 않는 그늘 아래에 어느 꽃이 있었다. 그 꽃의 잎은 옅은 하늘빛을 담았고, 진한 흰색을 담았다. 꽃은 은은한 향을 가졌다. 그리고 쿠로코는 그 꽃에서 피어난, 아니 태어난 존재였다. 하늘색과 흰색의 꽃에서 비롯한 존재의 눈은 옅은 하늘빛을 띠었고, 얼굴의 피부는 진한 흰색을 띠었으며, 머리카락은 다시 옅은 하늘빛을 가졌다. 쿠로코는 옅디옅은 빛을 가졌다. 꽃도 그랬다. 꽃은 옅은 빛을 띠어서 누군가의 눈에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쿠로코도 그랬다. 그러나 그 꽃을 한 번 본이는, 그 아름다움을 가슴 속에 새길 수밖에 없었다.
쿠로코에게는 향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 특유의 향이라기보다는, 은은한 꽃의 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언제나 그 향을 풍기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느낄 때, 쿠로코는 저도 모르게 은은한 향을 피워냈다. 그것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종류의 향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느껴본 이는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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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코는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고등학교에 가야하는 날이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만남이 있을 것이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이것은 설렘일까, 긴장일까. 왜인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쿠로코는 발걸음을 떼었다. 첫날인데 일찍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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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미 타이가. 쿠로코는 그 이름을 곱씹었다. 그에게 자신의 인상이 남았을지는 좀 의문이지만, 어쨌건 자신이 느낀 인상은 강렬했다. 말을 나누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는 존재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그리고 그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혼자 농구를 하는 모양이었다. 쿠로코는 그가 자신을 언제쯤이나 알아채려나, 하고 계속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가미는 어느 순간 공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카가미는 쿠로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에게는 아무 향이 나지 않아."
카가미는 그렇게 말했다. 쿠로코는 그런 그의 말을 가만히 들을 뿐이었다. 둘은 처음으로 말을 섞은 뒤 농구로 부딪혔다. 쿠로코는 자기가 이기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이 뛰어보고 싶었다. 당연히 쿠로코는 처참하게 졌다. 쿠로코는 별로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았다. 카가미가 더 그 사실에 놀라는 듯 보여서 살짝 웃음도 나왔다. 카가미의 눈이 쿠로코를 내려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맞닿았다. 그 뒤로 뭐라 뭐라 말을 하는 카가미의 말은 사실 귀에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쿠로코는 카가미의 눈을 올려다보며 빤히 쳐다보았다.
아, 당신이 나의 빛이다. 쿠로코는 직감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의 그림자이고.
은은한 향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카가미는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살짝 눈을 감았다. 향은 은은하면서도 상쾌했다. 카가미는 그 은은한 향이 몸을 상쾌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저 이곳의 공기가 좋구나, 하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쿠로코도 눈을 감았다. 은은한 향을 제일 짙게 느끼는 것은 쿠로코였다. 자신의 심장이 조금, 빨리 뛰는 것 같다고 쿠로코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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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미군."
"응?"
우리가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렇게 물으며 언제나 같은 표정을 짓는 쿠로코였다. 카가미는 눈을 세 번 정도 의식하며 깜빡거렸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피하는 것인가. 쿠로코는 살짝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명백히 곤란해 하는 표정이다. 확실히 기억하고 있나보네요. 카가미는 하하, 하며 웃었다.
"그때는, 음. 너를 잘 몰랐고 말이야."
한적한 점심시간이었다. 둘은 창가 자리에서 햇빛을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창밖의 하늘이 맑고, 구름이 희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쿠로코는 더 옅고, 하얬다. 카가미는 머리를 살짝 긁었다. 쿠로코는 그런 카가미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지금이 제일 중요하겠죠. 안 그렇습니까?"
쿠로코가 미소 지었다. 이제 나는 카가미 군을 제일 믿는 걸요. 카가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리고 카가미도 쿠로코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카가미는 공기가 어째서인지 상쾌해진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걸까. 여름, 꽤나 땀 냄새가 가득할 교실의 공기는 상쾌했고, 은은한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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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코!"
카가미가 쿠로코를 먼저 발견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한 번에 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쿠로코는 살짝 눈이 커져서 고개를 돌아보았다. 카가미가 무언가를 건넸다. 쿠로코는 영문도 모르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아, 바닐라 쉐이크다. 카가미는 쑥쓰러운듯이 쿠로코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어쩐지 너 생각이 나서, 물론 네가 안보였다면 내가 먹었겠지만 말이야."
쿠로코는 자신을 생각했다는 카가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보는 그 눈이 맑고 투명하다.
"고마워요. 카가미군."
아직 더운 어느 날이었다. 둘은 같이 길거리를 걸었다. 쿠로코는 바닐라 쉐이크를 마시며, 카가미가 만들어준 그늘에서 따가운 빛을 피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꽤나 소중한 일이라고, 쿠로코는 단 바닐라 쉐이크를 먹으며 생각했다.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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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습니다."
쿠로코는 비어있는 앞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가미를 보지 못한지도 얼마가 되었더라. 카가미 군을 보고 싶지만, 그래도 참아야겠죠. 쿠로코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보이지 않는 저 땅에 카가미가 땀을 흘리며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나의 일을 하겠어요. 쿠로코는 다짐했다.
거리 따위는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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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코, 괜찮아?"
쿠로코는 카가미를 바라보았다. 이게 얼마만의 재회였는데, 인사하지 못했어. 카가미는 자신을 부축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힘이 빠져 제 힘으로 지탱하기 힘든 몸을 챙겨주는 그에게 쿠로코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반가움. 쿠로코는 겨우겨우 발에 힘을 전하고, 카가미에게 기댔다. 그리고 물었다.
"카가미군,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카가미는 너는? 하고 물어왔다. 쿠로코는 그렇게 물어오는 그가 좋았다.
"카가미 군을 믿으니까, 잘 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정말로 그랬다. 그가 보고 싶긴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고, 또한 카가미를 믿었기 때문에 잘 지내려 했다. 카가미는 나도 그래, 하며 쿠로코의 자세를 똑바로 고쳐주었다. 쿠로코는 고맙습니다, 하며 카가미에게 살짝 기댔다. 카가미의 코끝을 어느 향이 간질이기 시작했다. 은은하게 상쾌한 향이 느껴졌다. 카가미는 그것이 어쩌면 쿠로코에게서 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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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립니까, 카가미군?"
"그럴 리가."
카가미가 웃으며 신발 끈을 맸다. 그는 밝은 표정이었다. 나도 하나도 안 떨립니다, 쿠로코는 경기장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쿠로코는 그랬다. 카가미 군과 함께라면 못할 게 없을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쑥스러워 입을 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쿠로코는 눈짓했다. 카가미는 신발 끈을 다 고쳐 메고 그런 쿠로코의 눈짓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경기 시작 휘슬이 불었다.
둘은 주먹을 부딪쳤다. 그것은 각오와, 약속과, 신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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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종료 휘슬이 코트를 갈랐다.
세이린이 승리했다. 윈터컵의 정상은, 그들이 차지했다. 모두가 잠시 정적을 가졌다. 그리고 곧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카가미는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둘 다 지쳐 숨을 토해내듯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서로를 보고 있었다.
이겼습니다, 카가미군.
이겼어, 쿠로코!
둘은 동시에 그렇게 말했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승리한 이들은 모두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그 둘만이 둘만의 세계에 있듯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말과 말이 닿은 순간 서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서로를 품에 안았다. 둘 다 기쁨에 가득 차있었다. 쿠로코의 얼굴이 카가미의 가슴팍에 파묻혔다. 심장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심장도 그렇게 빠르게 뛰고 있을까? 쿠로코는 궁금했다. 그렇지만 이품에 더 있고 싶었다.
그때였다. 카가미는 재채기를 했다. 콜록콜록. 쿠로코는 순간 당황해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제야 들어온 경기 코트의 다른 이들이 생경했다. 그러나 결국 쿠로코의 시선이 향한 것은 카가미였다. 카가미는 왜 이러지,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쿠로코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꽃가루가 날리고 있었다.
꽃에서 태어난 쿠로코는 사랑을 하면 꽃가루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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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지고 있었다. 승리의 기쁨이 아직 가시지 않은 당일이었다. 쿠로코는 카가미를 불러냈다. 그 둘이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길거리 농구 골대 옆 벤치였다. 카가미는 왜 불렀냐는 듯한 눈으로 쿠로코를 내려 보고 있었다. 쿠로코는 농구공을 들고 있었다. 그렇게 품에 안은 채로 심호흡을 했다. 쿠로코는 떨렸다. 떨림이 진정되지 않았다.
"카가미군."
뭐? 카가미는 물었다. 그 눈을 올려다보며 쿠로코는 마지막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카가미는 이곳의 공기가 상쾌하다고 생각했다.
"좋아해요."
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져가는 태양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빛이었다. 은은한 향을 풍기는 꽃가루가 날렸다. 카가미는 이번에는 재채기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웃었다. 그리고 쿠로코를 품에 안았다. 쿠로코는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그 온기에 눈을 떴다. 품이 따뜻했다. 카가미가 입을 열었다.
"나도."
은은하기만 하던 상쾌한 향이, 제법 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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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코, 먼저 어딜 갈까?"
"지금은 어두워졌잖습니까."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인데."
그날, 카가미와 쿠로코는 나란히 걸으며 그곳에서 멀어져갔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밤하늘이 그들을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둘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서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저녁 공기가 상쾌했다. 둘은 같이 숨을 들이쉬었다. 은은한 향이 느껴졌다. 터벅터벅, 그들의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한 송이 꽃이 피어나 있었다. 옅은 하늘빛과 진한 흰색을 담은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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