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흑] 옅은 하늘빛 향
*이글은 라기(@yhj2786)님의 리퀘로 쓰여졌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닿지 않는 그늘 아래에 어느 꽃이 있었다. 그 꽃의 잎은 옅은 하늘빛을 담았고, 진한 흰색을 담았다. 꽃은 은은한 향을 가졌다. 그리고 쿠로코는 그 꽃에서 피어난, 아니 태어난 존재였다. 하늘색과 흰색의 꽃에서 비롯한 존재의 눈은 옅은 하늘빛을 띠었고, 얼굴의 피부는 진한 흰색을 띠었으며, 머리카락은 다시 옅은 하늘빛을 가졌다. 쿠로코는 옅디옅은 빛을 가졌다. 꽃도 그랬다. 꽃은 옅은 빛을 띠어서 누군가의 눈에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쿠로코도 그랬다. 그러나 그 꽃을 한 번 본이는, 그 아름다움을 가슴 속에 새길 수밖에 없었다.

쿠로코에게는 향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 특유의 향이라기보다는, 은은한 꽃의 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언제나 그 향을 풍기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느낄 때, 쿠로코는 저도 모르게 은은한 향을 피워냈다. 그것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종류의 향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느껴본 이는 별로 없었다.

-

쿠로코는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고등학교에 가야하는 날이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만남이 있을 것이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이것은 설렘일까, 긴장일까. 왜인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쿠로코는 발걸음을 떼었다. 첫날인데 일찍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였다.

-

카가미 타이가. 쿠로코는 그 이름을 곱씹었다. 그에게 자신의 인상이 남았을지는 좀 의문이지만, 어쨌건 자신이 느낀 인상은 강렬했다. 말을 나누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는 존재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그리고 그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혼자 농구를 하는 모양이었다. 쿠로코는 그가 자신을 언제쯤이나 알아채려나, 하고 계속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가미는 어느 순간 공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카가미는 쿠로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에게는 아무 향이 나지 않아."

카가미는 그렇게 말했다. 쿠로코는 그런 그의 말을 가만히 들을 뿐이었다. 둘은 처음으로 말을 섞은 뒤 농구로 부딪혔다. 쿠로코는 자기가 이기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이 뛰어보고 싶었다. 당연히 쿠로코는 처참하게 졌다. 쿠로코는 별로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았다. 카가미가 더 그 사실에 놀라는 듯 보여서 살짝 웃음도 나왔다. 카가미의 눈이 쿠로코를 내려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맞닿았다. 그 뒤로 뭐라 뭐라 말을 하는 카가미의 말은 사실 귀에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쿠로코는 카가미의 눈을 올려다보며 빤히 쳐다보았다.

아, 당신이 나의 빛이다. 쿠로코는 직감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의 그림자이고.

은은한 향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카가미는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살짝 눈을 감았다. 향은 은은하면서도 상쾌했다. 카가미는 그 은은한 향이 몸을 상쾌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저 이곳의 공기가 좋구나, 하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쿠로코도 눈을 감았다. 은은한 향을 제일 짙게 느끼는 것은 쿠로코였다. 자신의 심장이 조금, 빨리 뛰는 것 같다고 쿠로코는 생각했다.

-

"카가미군."
"응?"

우리가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렇게 물으며 언제나 같은 표정을 짓는 쿠로코였다. 카가미는 눈을 세 번 정도 의식하며 깜빡거렸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피하는 것인가. 쿠로코는 살짝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명백히 곤란해 하는 표정이다. 확실히 기억하고 있나보네요. 카가미는 하하, 하며 웃었다.

"그때는, 음. 너를 잘 몰랐고 말이야."

한적한 점심시간이었다. 둘은 창가 자리에서 햇빛을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창밖의 하늘이 맑고, 구름이 희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쿠로코는 더 옅고, 하얬다. 카가미는 머리를 살짝 긁었다. 쿠로코는 그런 카가미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지금이 제일 중요하겠죠. 안 그렇습니까?"

쿠로코가 미소 지었다. 이제 나는 카가미 군을 제일 믿는 걸요. 카가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리고 카가미도 쿠로코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카가미는 공기가 어째서인지 상쾌해진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걸까. 여름, 꽤나 땀 냄새가 가득할 교실의 공기는 상쾌했고, 은은한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쿠로코!"

카가미가 쿠로코를 먼저 발견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한 번에 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쿠로코는 살짝 눈이 커져서 고개를 돌아보았다. 카가미가 무언가를 건넸다. 쿠로코는 영문도 모르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아, 바닐라 쉐이크다. 카가미는 쑥쓰러운듯이 쿠로코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어쩐지 너 생각이 나서, 물론 네가 안보였다면 내가 먹었겠지만 말이야."

쿠로코는 자신을 생각했다는 카가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보는 그 눈이 맑고 투명하다.

"고마워요. 카가미군."

아직 더운 어느 날이었다. 둘은 같이 길거리를 걸었다. 쿠로코는 바닐라 쉐이크를 마시며, 카가미가 만들어준 그늘에서 따가운 빛을 피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꽤나 소중한 일이라고, 쿠로코는 단 바닐라 쉐이크를 먹으며 생각했다.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
"믿습니다."

쿠로코는 비어있는 앞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가미를 보지 못한지도 얼마가 되었더라. 카가미 군을 보고 싶지만, 그래도 참아야겠죠. 쿠로코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보이지 않는 저 땅에 카가미가 땀을 흘리며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나의 일을 하겠어요. 쿠로코는 다짐했다.

거리 따위는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

"쿠로코, 괜찮아?"

쿠로코는 카가미를 바라보았다. 이게 얼마만의 재회였는데, 인사하지 못했어. 카가미는 자신을 부축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힘이 빠져 제 힘으로 지탱하기 힘든 몸을 챙겨주는 그에게 쿠로코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반가움. 쿠로코는 겨우겨우 발에 힘을 전하고, 카가미에게 기댔다. 그리고 물었다.

"카가미군,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카가미는 너는? 하고 물어왔다. 쿠로코는 그렇게 물어오는 그가 좋았다.

"카가미 군을 믿으니까, 잘 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정말로 그랬다. 그가 보고 싶긴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고, 또한 카가미를 믿었기 때문에 잘 지내려 했다. 카가미는 나도 그래, 하며 쿠로코의 자세를 똑바로 고쳐주었다. 쿠로코는 고맙습니다, 하며 카가미에게 살짝 기댔다. 카가미의 코끝을 어느 향이 간질이기 시작했다. 은은하게 상쾌한 향이 느껴졌다. 카가미는 그것이 어쩌면 쿠로코에게서 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떨립니까, 카가미군?"
"그럴 리가."

카가미가 웃으며 신발 끈을 맸다. 그는 밝은 표정이었다. 나도 하나도 안 떨립니다, 쿠로코는 경기장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쿠로코는 그랬다. 카가미 군과 함께라면 못할 게 없을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쑥스러워 입을 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쿠로코는 눈짓했다. 카가미는 신발 끈을 다 고쳐 메고 그런 쿠로코의 눈짓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경기 시작 휘슬이 불었다.

둘은 주먹을 부딪쳤다. 그것은 각오와, 약속과, 신뢰였다.

-

경기 종료 휘슬이 코트를 갈랐다.

세이린이 승리했다. 윈터컵의 정상은, 그들이 차지했다. 모두가 잠시 정적을 가졌다. 그리고 곧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카가미는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둘 다 지쳐 숨을 토해내듯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서로를 보고 있었다.

이겼습니다, 카가미군.
이겼어, 쿠로코!

둘은 동시에 그렇게 말했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승리한 이들은 모두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그 둘만이 둘만의 세계에 있듯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말과 말이 닿은 순간 서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서로를 품에 안았다. 둘 다 기쁨에 가득 차있었다. 쿠로코의 얼굴이 카가미의 가슴팍에 파묻혔다. 심장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심장도 그렇게 빠르게 뛰고 있을까? 쿠로코는 궁금했다. 그렇지만 이품에 더 있고 싶었다.

그때였다. 카가미는 재채기를 했다. 콜록콜록. 쿠로코는 순간 당황해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제야 들어온 경기 코트의 다른 이들이 생경했다. 그러나 결국 쿠로코의 시선이 향한 것은 카가미였다. 카가미는 왜 이러지,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쿠로코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꽃가루가 날리고 있었다.

꽃에서 태어난 쿠로코는 사랑을 하면 꽃가루를 날렸다.

-

노을이 지고 있었다. 승리의 기쁨이 아직 가시지 않은 당일이었다. 쿠로코는 카가미를 불러냈다. 그 둘이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길거리 농구 골대 옆 벤치였다. 카가미는 왜 불렀냐는 듯한 눈으로 쿠로코를 내려 보고 있었다. 쿠로코는 농구공을 들고 있었다. 그렇게 품에 안은 채로 심호흡을 했다. 쿠로코는 떨렸다. 떨림이 진정되지 않았다.

"카가미군."

뭐? 카가미는 물었다. 그 눈을 올려다보며 쿠로코는 마지막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카가미는 이곳의 공기가 상쾌하다고 생각했다.

"좋아해요."

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져가는 태양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빛이었다. 은은한 향을 풍기는 꽃가루가 날렸다. 카가미는 이번에는 재채기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웃었다. 그리고 쿠로코를 품에 안았다. 쿠로코는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그 온기에 눈을 떴다. 품이 따뜻했다. 카가미가 입을 열었다.

"나도."

은은하기만 하던 상쾌한 향이, 제법 진해졌다.

-

"쿠로코, 먼저 어딜 갈까?"
"지금은 어두워졌잖습니까."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인데."

그날, 카가미와 쿠로코는 나란히 걸으며 그곳에서 멀어져갔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밤하늘이 그들을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둘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서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저녁 공기가 상쾌했다. 둘은 같이 숨을 들이쉬었다. 은은한 향이 느껴졌다. 터벅터벅, 그들의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한 송이 꽃이 피어나 있었다. 옅은 하늘빛과 진한 흰색을 담은 꽃이었다.


'KRB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화] 꺼져버리다  (0) 2016.12.24
[청화] 꺼져버리다
센티넬 아오미네 × 센티넬 카가미

불꽃은 어둠을 삼키면서 하염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 불을 에워싸고 있었다. 아오미네는 그 불의 색을 알았다. 그리고 그 불의 주인을 알았다. 아오미네는 그 불의 색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너의 색이야.

아오미네는 불꽃을 향해 달려들었다. 인파란 뚫기 힘든 것이었으나 아오미네는 그저 돌진했다. 불꽃의 가운데, 그가 있을 것이다. 물을 아무리 부어도, 모래주머니를 아무리 던져도 불길은 멎어들지 않는다. 그랬기에 아오미네는 달려들었다. 익숙한 불꽃의 색깔, 아오미네는 이제 불꽃의 바로 앞에 있었다. 사람들을 통제하던 경찰들이 미쳤냐고 그를 끌어내려고 했지만, 아오미네는 그 손길들을 쳐낼 뿐이었다. 아오미네는 불의 열기에 다가갔다. 그리고서는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렇지만 아오미네는 듣지 않았다.

불꽃은 어둠을 삼키면서 하염없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 안에 아오미네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아오미네는 물속에 있었다. 그가 만약 물을 두르지 않았다면 이 꺼지지 않는 불꽃에 타 죽어버렸을 것이다. 열기가 뜨거웠다. 카가미, 카가미! 아오미네는 들리지도 않을 외침을 계속 지르며 그 불길의 중앙으로 달려갔다.

아, 너가 있다.

아오미네는 가장 진한 불꽃 속에 있는 카가미에게 손을 뻗었다. 아오미네의 몸은 차가운 물로 감싸져 있었다. 의식을 잃은 듯이 쓰러져 있던 카가미에게 차가운 물이 닿지, 카가미는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듯이 움찔거렸다. 카가미, 카가미. 정신 차려. 아오미네는 카가미를 끌어안았다. 그의 몸덩이에서 나오는 열기는 차가운 물로 감싸진 피부에게도 전해질 정도로 뜨거웠다.

카가미, 내 말이 들려? 들리냐고!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오미네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의 몸이 어느 순간 뜨거운 불이 되어 녹아내릴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카가미, 카가미, 카가미…, 공포에 질린 푸른 머리의 남자가 울부짖었다.

그리고 불길이, 멎어들기 시작했다.

-

내가 너의 가이드였다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아오미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와서 새로 생각한 것만은 아니었다. 카가미의 가이드였던 쿠로코가 언제나 카가미 곁에 있을 때도 아오미네는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면 네가 나의 가이드거나. 아오미네는 그런 생각이 쿠로코와 자신의 가이드인 모모이에게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따금 자신도 그렇게 붙어 있고 싶단 생각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쿠로코가 그날 그렇게 죽어버린 이후로는, 거의 매일 그런 생각을 했다.

-

그날은 꽤나 화창한 날이었다. 쿠로코와 카가미는 언제나처럼 붙어있었고 아오미네는 그런 그들에게 찾아갔다. 농구나 한판 하자, 며 다가간 아오미네를 카가미는 밝은 미소로 받아주었다. 쿠로코도 마찬가지였고, 그날은 그저 일상 중에 하루일 것만 같았다. 그랬어야만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카가미가 그것을 받았다. 그리 길지 않은 통화였다. 쿠로코는 뭡니까, 카가미 군? 하며 통화를 끊은 카가미에게 물어왔다. 카가미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임무래, 쿠로코. 센티넬 연구소에서 온 연락이었다.

아오미네는 자신을 부르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여겼지만, 뭐 한명이면 충분한 일인가보지네, 하며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카가미가 말을 하지 않았다. 카가미? 카가미? 카가미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거칠게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뭐지, 잘못 전화한 건가. 아오미네는 끊겠다고 말한 뒤 종료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이었다.

"…도와줘…"

아오미네는 그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었다.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카가미는 받지 않았다. 아오미네는 두려움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리고 아오미네는 연구소로 달려갔다. 그는 카가미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 라고 생각하며 농구공을 튕기며 그들을 보내주었다. 아오미네는 그래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악질적인 장난, 아니 장난이라고 할 수 없는 함정이었다.

그 이후 몇 시간 후, 카가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오미네는 이제 끝난 모양이

-

연구소에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말만을 들려준 뒤 아오미네를 거의 강제로 쫓아냈다. 아오미네는 연구소에서 별로 호감을 받는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도 있겠지만, 정말로 그들은 카가미의 행방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분명 임무라고 했다고요! 그런 외침 따위는 그저 무시당할 뿐이었다.

그런 아오미네가 카가미를 찾은 방법은 직감이었다. 저 멀리 불꽃이 보이는 듯 아른거렸다. 본디 그가 센티넬이었기에 감각이 예민하긴 했지만, 그것은 그런 감각을 뛰어넘은 느낌이었다. 직감, 아오미네는 카가미가 저곳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정말로, 카가미는 그곳에 있었다.

"…아, 오미네…?"

처참하다. 아오미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리저리 탄내가 가득했고, 무엇보다 카가미는 지금도 덜덜 떨며 불 속에 있었다. 테츠는 어디 있지, 카가미가 저렇게 될 때까지 뭘한거야. 아오미네는 일단 카가미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쿠로코를 찾았다.

아. 아오미네는 시선을 돌린 순간, 놀란 눈으로 멍청하게 그런 소리를 내뱉어야했다. 아오미네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카가미가 왜 저렇게 절망에 찬 눈으로 능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쿠로코는, 더 이상 숨 쉬고 있지 않았다. 죽어있었다.

-

가이드를 죽여 버리고 센티넬을 거의 반 미친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참으로 지능적이면서도 악질적인 혐오 범죄였다. 그들은 카가미에게 원한이 있던 이였을까. 아님 그저 센티넬이라는 존재를? 아오미네는 그자의 시신이라도 붙잡고 원망을 토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카가미의 불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아오미네는 대체 이 원망을 어디다 풀어야할 지 몰랐다.

카가미는 그날 처음으로 폭주했고, 사람을 살상했다. 가이드인 쿠로코가 그의 눈앞에서 죽어버렸으니 센티넬의 눈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카가미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강했을 뿐이었다. 카가미의 불을 물로 꺼버리려던 이들은 물에도 잦아들지 않는 불에 타 죽어갈 뿐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쿠로코의 시신만은 멀쩡했다, 정말로.

아오미네는 그날 거의 정신을 놓고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며 쿠로코를 찾는 카가미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카가미의 눈빛은 그날부터 생기가 도는 일이 없었다. 아오미네는 그날부터 카가미에게서 떨어지려 한 적이 없었다.

-

카가미는 그 뒤로 거의 반 폐인이 되어갔다. 가이드가 없어 통제되지 않는 센티넬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에게는 약만이 답이었다. 카가미는 약을 계속 먹었다. 그 약은 내성이 쉽게 생기는 약이었고 카가미는 이제 한번 열기를 느낄 때마다 거의 약통 째로 입에 들이부었다. 카가미는 물 없이 약을 삼키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 아오미네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왜 나는 너를 도와줄 수 없을까. 아오미네는 이따금 카가미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기에 앓을 때 차가운 물로 식혀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의 물로는 가이드를 잃은 센티넬의 불꽃을 끄지 못했다.

약이란 가이드처럼 완전한 효과를 주지 못했다. 그랬기에 결국 카가미는 불길을 일으켰다. 그것은 예상할 수 없는 순간에 일어났다.

카가미의 불은 꺼지지 않았으나 번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마 카가미가 다른 이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서일 거라고 아오미네는 짐작했다. 겨우겨우 어느 한 면 정도를 통제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카가미는 그렇게 폭주를 거듭했다. 아오미네는 그때마다 불속에서 카가미를 꺼냈다. 불꽃의 근원을 잃은 불 정도는, 아오미네의 물로 쉽게 끌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카가미는 불꽃에 하나가 된 듯이 아오미네의 품에 안기지 못했다. 아오미네는 두려움에 가득 차서 카가미를 불렀다. 하염없이 그의 이름을 외쳤다. 아오미네는 카가미가 불꽃과 하나가 되어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카가미는 아오미네의 긴긴 부름 끝에 눈을 떴다. 그제야 아오미네는 카가미를 안고 불길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주인을 잃어가는 불이 거칠게 일렁였다.

-

"미안, 아오미네."

카가미는 연구소의 병실에 있었다. 안정제를 링거로 맞고 있으면서도 온갖 장치들이 그의 배와 등과 허리에 꽂혀 연결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카가미는 알약으로 된 안정제를 입에 거의 들이붓다시피 털어 넣고 있다. 아오미네는 그런 카가미를 막고 싶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카가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오미네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번에도 너가 날 도와줬는데, 맨날 폐만 끼치고."

카가미는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힘이 없다. 너의 미소는 언제나 밝고 활기찼었는데, 이제는 더이상- 아오미네는 지쳐버린 기색이 완연한 그 미소를 보고 잔뜩 울상을 짓고 말았다. 카가미는 그런 아오미네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 미안해…."

카가미의 표정에는 짙은 죄책감과 허무감이 가득했다. 그 표정이 너무도 낯설면서도 앞으로는 익숙해져야한다고 생각하니 아오미네는 정말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위로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아오미네는 아니야, 너 잘못이 아니야,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빌어먹게도, 자신의 입은 그런 상냥한 말을 건네주지 못할 것임을 아오미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오미네는, 입을 다물었다.

-

눈이 오던 날이었다. 카가미는 오늘도 많은 장치들을 달고, 몇 개의 약통을 머리맡에 둔 채로 병실 침대에 앉아있었다. 저번 폭주 이후로 줄곧 카가미는 연구소를 떠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아오미네도 연구소에서만 머물렀다. 많은 일들은 후순위였다. 아오미네는 카가미가 자신이 보지 않는 동안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결국은 한계가 오게 되어 있다고…"

카가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오미네는 그런 말을 내뱉는 카가미가 너무도 아스라해서 무서웠다. 아오미네는 두려움에 익숙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센티넬로 각성하기 이전부터도 항상 두려움을 몰랐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즘 아오미네의 감정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카가미가 곧 떠나버릴 사람처럼 굴었기 때문이었다. 아오미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카가미도 자신이 결국 곧 한계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아오미네도 직감하는 바였다. 아오미네는 처음에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백의의 거짓말로라도 카가미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오미네는 그리 섬세한 말을 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테츠가 보고 싶어?"

아오미네는 그렇게 묻고 말았다. 카가미의 눈은 언제나 공허했다. 쿠로코를 잃고 난 뒤부터 한 번도 그렇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아오미네는 이것이 같잖은 질투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어서, 아오미네는 묻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걸."

카가미는 그렇게 대답했다. 모든 것에 순응하고 체념해버린 이의 대답이었다. 아오미네는 차라리, 응, 보고 싶어-라고 했으면 덜 비참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가미가 그랬기에 아오미네는 비참했다. 그 비참함을 견딜 수 없어서 병실 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쿵, 거칠게 닫힌 병실 안에는 비어버린 카가미만이 남아있었다. 카가미는 닫혀버린 병실 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카가미는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붙잡고 자신과 같이 있어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력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아오미네를 붙잡을만한 핑계나 자격 따위는 더 이상 없지 않은가. 카가미는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는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가 뜨거웠다.

아- 카가미는 직감했다. 곧 끝이라고.

-

다시 한 번 불꽃이 타올랐다. 그것은 대체 무엇을 연료로 하기에 꺼지지도 않는 것일까. 아, 그것은 카가미의 정신과 몸을 연료로 하는 불이었다. 꺼지지 않는 불이 아니었다. 그것은 카가미를 갉아먹는 불이었다. 아오미네는 불길을 헤치고 들어갔다. 이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가. 그러나 오늘은 무엇인가 달랐다.

아오미네, 미안해.

오늘 카가미는 자신을 바라보며,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 눈빛은 여전히 죽어있다. 아오미네는 허리를 굽히고 카가미에게 손을 뻗었다. 카가미는 아오미네의 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 이게 마지막 불꽃이라는 것을 아오미네는 직감했다. 아오미네는 자신의 그 예민한 직감이 너무나 싫었다. 카가미는 이제 마지막 불꽃을 태울 것이다. 아오미네는, 이제라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강한 충동이 들었다. 마지막이기에, 마지막인 탓에. 아오미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카가미, 좋아해."

아오미네는 눈을 떴다. 카가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카가미는, 웃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카가미는 환하게 웃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카가미는 기쁨으로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카가미의 눈이 비어 있지 않았다. 아오미네는 카가미를 끌어안았다. 카가미는 뜨거웠다. 뜨겁고 뜨거워 데일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오미네는 차가웠다. 차갑고 차가워 얼어버릴 것만 같을 정도로. 그러나 둘 중 누구도 데이지도 얼지도 않았다.

아오미네는 눈물을 흘렸다. 카가미는 이미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아, 이것이 마지막이리라. 둘은 직감했다. 아오미네는 카가미를 끌어안은 채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차가운 액체가 뚝, 떨어졌다. 눈물이었겠지, 아오미네는 생각했다.

그것이 정말로 마지막이었다.

-


아오미네는 카가미를 들어올렸다. 그것은 겉만 남은 빈껍데기였다. 불길이 잦아들고 있었다. 아오미네는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끄지 않았다. 그것이 카가미가 남긴 마지막 불이었기 때문이다. 불꽃의 색이 아름다웠다. 아오미네는 일렁이며 잦아드는 불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남은 불씨조차 꺼져버렸을 때, 아오미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KRB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흑] 옅은 하늘빛 향  (0) 2016.12.2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