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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히나] 비, 그리고 외침

HAEY 2016. 12. 18. 23:00
[카게히나] 비, 그리고 외침
귀신을 보는 카게야마 × 어린 귀신 히나타
*이 글은 존잘님이 되고싶다(@yhs981126)와의 합작입니다.

0.
안녕, 나는 히나타 쇼요야. 

나는 이렇게 생겼어. 내 이름에 히나타는 햇살이라는 뜻이래. 어른들이 그랬는데, 그게 나랑 잘 어울린다고 했어! 그렇지 않아? 에이, 대답해주기만 하면, 내가 다들 빛나는 태양을 닮았다고 말한 햇살을 담은 미소를 보여줄 텐데.

그러니까, 대답해줘-


1.
-아저씨, 아저씨!

시끄러워, 나는 덮고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어버렸다. 시끄러운 소리가 조금은 멀어진듯하다. 그렇게 멀어진 소리를 신경 쓰지 않으려 하며 다시 잠에 빠지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차가운 느낌이 온 몸에 찾아왔다. 이불의 따스한 느낌이 없어져버린 것이었다.

젠장, 망할 꼬마!

나는 속으로 그런 종류의 소리를 외치면서-잠을 너무 잔 탓에 목이 잠겨 실제로 행하지는 못했다-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선명해지는 시야에서 보인 것은 주황색의 꼬마였다. 언제나 같은 휴일이었다. 저 애는 잠도 안자나, 나는 처음에 툴툴 거리며 생각하다가

아- 쟤는 죽었지.

그런 생각에 닿아버리는 것이었다. 이 활기 넘치는 꼬마가 이미 목숨이 다한 존재라는 것이 가끔 나는 와 닿지 않았다. 이 애가 귀신치고는 너무 활달한 거 아닌가 싶다.

“꼬마! 얼마만의 휴식일인데 자꾸 방해할래?!”

소리 지르며 이불을 찾자 꼬마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 눈빛이 간절하다. 심심하다는 거겠지, 함께한 세월이 꽤 되어버려서 그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꼬마가 아니라 쇼요라고요!

아 내가 잘못 생각했다. 정정하겠다. 간절하긴 무슨, 그냥 시끄럽다.


2.
휴일에 꼬마는 항상 나와 놀아달라고 졸랐다. 배구 경기나 훈련을 한다고 나는 집에 있지 않을 때가 많았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쟤가 집에 얌전히 있어서 심심한 게 아니다. 항상 내가 어디를 가건 꼬마는 곁에 있었다. 아무리 귀신이라도 어린 애를 혼자 집에 놔둘 수는 없지. 물론 꼬마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알면 분명 발끈할 것이다. 자기는 어린 애가 아니라면서. 웃기는 꼬마다. 나보다 스무 살 정도는 어리면서, 어린 애가 아닌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다니.


3.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 꼬마와 놀아준다고 상가에 나와 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쉬겠다고 우겨보았지만 결국 끌려나와버렸다. 꼬마의 고집은 정말로 대단했다. 나는 애초에 밖을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보는 귀신이 그저 쇼요 뿐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대체 뭘 사야하나. 처음에는 귀신에게도 진짜 돈을 써야하는 건가 생각했는데, 꼬마는 그런 나의 질문에 그럼 가짜로 주게요? 라며 활짝 웃었다. 그 미소가 꽤나 환하고 순수 보여서 나도 모르게 알겠어, 라고 대답해버렸다. 내가 후회하는 일 탑5를 꼽으면 아마 순위권에 들지 않을까 싶다.

“뭐 사고 싶은데.”

나는 조용히 낮게 중얼거렸다. 다행스럽게도 이 꼬마는 꽤나 귀가 밝았다. 그 덕에 존재하지도 않는 상대와 계속 대화를 하는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고 있지 않을 수 있다-음, 부디 예외가 없기를-. 내가 혼잣말 엄청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케이크!

그렇게 외치는 꼬마는 평소의 신나 죽겠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도 언제나 짓는 밝은 표정은 여전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꼬마는 나의 수락에 엄청 환호를 지르고 기쁨의 춤인지 뭔지 하는 몸동작을 취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자신감 덕분에 저렇게 활보할 수 있는 건가. 나는 보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만.


4.
우리, 아니 내가 산 것은 내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였다. 결코 내 의견이 반영된 것은 아니다. 결코. 요즘 별로 신경을 못 써줬다고 사과의 의미로 사주려고 한 거였으니까 말이다. 꼬마가 그런데 마침 딸기 맛을 골랐을 뿐이다. 이거, 어차피 쟤는 못 먹을 테니까 내가 다 먹을 텐데. 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이제 쉴 테니까, 먹어.”

그래도, 꼬마는 먹는 기분을 실컷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불을 덮었다. 목까지 추켜올린 이불을 온 몸에 감듯이 했다.

밖에 나가면 온갖 것들이 나를 바라보는 느낌으로 먹혀지는 것만 같다. 못 볼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나한테가 쇼요가 붙은 건 정말 다행인 일 아닐까. 아, 이불 속은 너무나도 따뜻하다. 나는 어느 순간 잠에 들어버렸다.


5.
“.....꼬마?”
-꼬마 말고 쇼요!

아니, 음. 그래. 그러니까, 나는 지금 몹시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해있는 듯하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 여튼 나는 꼬마의 주황색 눈을 빤히 내려다보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자 했다. 어째서 이 꼬마가 어제 내가 사준 딸기 케이크에 초를 꽂아서 나에게 내밀고 있는 걸까.

……내 생일이던가?

옆에 걸린 달력에 시야가 닿아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 아저씨 생일 축하해!

아, 맞구나. 나는 꽤나 놀라버려서, 무척 커진 눈으로 꼬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꼬마는 마치 햇빛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일을 축하한다며 말했다.

“어, 어. 고마워.”

나는 당황스런 마음으로 케이크를 건네받았다. 초의 개수는 정확히, 스물여덟 개. 내 나이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구나. 나는 괜히 찡해졌다.

-라이터 불 붙이기는 어려워서 불은 못 붙였어! 아저씨가 불 붙여줘!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왜인지 너무 귀엽게 보여서, 나는 간만에 밝게 미소를 지어보았다. 그리고 기대치도 않은 누군가에게 생일을 축하받았다는 그런 기쁜 마음도.


6.
연습 중인데, 꼬마는 왜인지 오늘 먼저 집에 가버렸다. 거의 이런 적 없었는데.


7.
어둑해진 밤하늘은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비를 살짝 맞아보았다. 꽤나 굵은 것 같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비는 정말로, 싫다.

나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재킷을 벗었다. 나는 항상 마지막까지 연습을 했기 때문에 도와줄만한 동료들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활용할 수 있는 건, 내 옷 뿐이었다. 한순간 꼬마가 우산을 들고 체육관 앞에 서있는 상상과 기대를 해보았지만, 음, 다른 사람들이 혼자 둥둥 떠다니는 우산을 보며 무서워할 거라는 생각과 쇼요도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이내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나는 달렸다. 비는 너무도 차갑다.


8.
‘그날’도 비가 왔었다. 나는 비로 적셔진 땅 위에 미끄러져 쓰러진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굵은 빗방울이 눈을 맞추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날의 그 일도 이런 어둠과, 빗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내가 저주하는 이 눈을 얻게 된 것도 그 날이었다. 모든 불행의 시작도 그날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고 생각했지만, 그날 이후로 단 하루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아. 그날도, 이 날짜였던가. 겨울,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

내가 생일을 더 이상 챙기지 않게 된 건 그런 이유도 있었던 걸까. 애써 닫아놓은 생각들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틈으로 빠져나와 나의 몸을 타고 기어오른다. 생각해내기 싫은 것들이 존재하고, 망각이란 그런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터인데, 어째서 잊혀지지 않았는가.

수도를 틀어놓은 듯한 쏟아지는 물소리가, 나의 세계를 가득 채웠다. 빗발이 세차다.

나는 그날의 기억에 짓눌려, 일어나야한다는 것을 앎에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마치 그날의 그, 순간과도 같이.

9.
언제나 같은 날이었다. 나는 연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으니까 교복을 입은 채였고, 딱히 특별한 것은 없어보였다. 엄청 굵은 비가 왔다는 것만 빼면.

평소와 같다는 것은 그때까지, 나에게 무료하고 따분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오늘은 지름길로 가보자-했던 것이 그날이 아직까지 그날이라고 불리는 이유. 지름길은 포장되어있지 않은 골목 도로였다. 나는 겁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곳은 어둡고 음습했으며 자칫하면 길을 잃을 것 같은 공간, 그리고 굵은 비까지 쏟아지던 날이었는데.

나는 헤드폰을 꼈다. 빗소리가 너무 시끄럽다는 이유였다. 튼 것은 시답잖은 대중가요.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빗소리를 들리지 않게 해 줄 시끄러움뿐이었기에 꽤나 만족했다. 나는 우산을 들고 있었지만 그래도 머리가 젖을까봐 외투의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길을 걸어갔다. 아- 내가 그 음악으로 인해 듣지 못한 것은, 빗소리뿐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나의 허리를 걷어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은 정말로 묘사할 수 없던 신선한, 그리고 잔인한 고통이었다. 헤드폰은 벗겨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적의로 인해 축축한 바닥을 얼마나 굴렀던가?

그리고 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 뒤에 젤 가깝게 기억하는 것은 그저 병원의 하얀 천장. 아, 살짝 기억나는 게 있다면, 누군가가 있었고 나는 어느 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마주쳤다는 사실이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순간동안 참으로 많이 부서지고 망가져있었다. 나는 재활을 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수사에 협조해달라는 말에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리였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것이 정신적인지, 혹은 육체적인지, 둘 다인지는 나도 모른다.


10.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때부터 살아있지 않은 존재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끔찍해서 견딜 수 없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어떤 것들은 멀쩡하지만-마치 쇼요처럼-, 어떤 것들은 상해있고, 또 다른 것들은 정말로 끔찍한 몰골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것이 ‘살아있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10년 전의 나는 그런 걸 어떻게 견뎌냈을지, 나도 모르겠다. 여튼, 나는 정신과도 몇 번 들락날락했다. 의사는 그것이 그날의 후유증이라고 했다. 그것이 나의 눈에만 보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지만, 결국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미친 걸까? 나는 이따금 고민한다.

사실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나의 세계는 이미 죽어버렸는데.


11.
-아저씨, 아저씨.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아, 너무나 아득하다. 아, 잠들어버리고 싶어. 세상은 추위로 가득 차서, 너무 싫어.

-정신 차려요, 아저씨! 카게야마!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다. 나를, 부른다. 나는 눈을 떴다. 비에 젖지 않는 꼬마의 말끔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결코, 여기까지 달려오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겠지. 아,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안 돼, 아저씨! 안 돼! 주황색의 꼬마가 나를 애타게 부른다.

아, 낯설지 않은 목소리, 이 외침.

나는 어디선가 들었을까 떠올리려 했지만, 뇌까지 젖어버린 모양인지 머리는 작동하지 않고 고장 난 듯 윙윙 거렸다. 나는 너무 춥고 외로웠고 또 두려웠고 고통스러웠다.

-도와주세요!

쇼요, 그 외침은 아무도 듣지 못할 텐데, 나 말고는. 아, 그렇지. 나는 너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이렇게 잠들어버리면 안되겠지.

나는 눈을 떠서 세상을 보았고, 몸을 일으켜서 세상을 밟았다. 춥다, 그리고 온 몸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나는 마주보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해?”

그렇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네는 나를 보며, 꼬마는 시선을 떼지 않는다. 그리고 꼬마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다가가서 꼬마를 품에 담았다. 너는, 서럽게도 울었다.

-아저씨는 바보에요.

아아, 그럴지도. 나는 그런 꼬마의 말에 대해 소리 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품에 안겨 우는 이 꼬마는 나의 속을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12.
“꼬마 네가 나한테 처음 얼굴을 들이민 게, 몇 년 전이더라.”
-아저씨가 24살 때요.

스물 네 살 때라, 재활이 완벽하게 끝났다고 했고, 프로 배구단에 스카우트 되었던 해였지. 그때 꽤나 나는 밝아질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후유증이 다시 찾아올 거라는 예상도 없었고, 나는 다시 내가 날기만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그날을 잊어버린 채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음, 그나저나 그 중간에 꼬마가 찾아왔다니, 뭔가 어색했다.

“뭔가, 계속 함께한 것만 같아서, 몇 년이 분명 짧지 않은 걸 알면서도 어색해.”

꼬마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13.
멀쩡한 귀신을 보는 일은 꽤나 드물다. 그래서 나는 꼬마를 처음 봤을 때 진짜 인간 꼬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생기와 선명함을 가진 꼬마를 전혀 귀신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꼬마는 처음에 나를 몰래 따라다녔었다. 대체 얼마나 몰래 따라다녔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꼬마를 진짜 살아있는 아이라고 처음에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기척을 숨겼을 가능성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돌아보니 그런 걸 물어 본 적이 없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꼬마는 결국 들켜서 나의 곁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나는 꼬마가 고아일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리고 같이 살까, 하며 집 주인에게 물어보면 될 거야, 라고 말 한 순간에,

-아저씨, 저 죽었는데요.

그렇게 고백해 온 것이다. 나는 꽤 놀랐지만, 받아들이는 데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여튼 우리는 같이 살기로 했으니까.

아 맞다, 아저씨란 호칭 말인데, 나는 처음에 형이라고 부르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꼬마는 정말로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포기해버렸다는 그런 이야기. 아, 내가 24살 젊은 나이부터, 지금도 젊은 데 계속 아저씨라고 불리고 있다니.

뭐, 딱히 불만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14.
나는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새해첫날부터 독감 확진이라니, 이게 뭐람.


15.
쇼요, 고마워.
예?
네가 있어줘서 다행이야.

그렇게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아버리는 카게야마를, 쇼요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그의 열이 뜨겁다. 쇼요는 눈을 감았다 떴다. 카게야마는 그냥 눈을 감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

쇼요는 열에 시달리는 카게야마를 안타까운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머리를 살짝 만져주었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게. 카게야마는 그런 쇼요의 손길을 알지 못한채로 쌕쌕거리며 자고 있다. 쇼요는 그가 남긴 말을 되씹었다.

나의 이기심이 아저씨를 고통에 빠뜨렸을지도 모르는데.


16.
쇼요가 대충 나를 먹여 살리고 간호해준 덕분에 금방 나을 수 있었다. 이제는 배구 시합에 나갈 수 있다. 한창 시즌 중인데 이게 뭐하는 짓이람. 저 저번 주에 미끄러져서 접질렸을 때에도 엄청 감독님께 깨졌었는데.


17.
-아저씨.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꿈에서 깨어나 눈을 떴는데, 주황색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악몽이라도 꿨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자는 모습이 딱 그렇게 보였던 걸까. 왜인지, 악몽이 오늘은 바로 흩어지지 않았다. 꿈이란 항상 눈을 뜨면 흩어져 버리는데. 지금은 아직 형체를 갖고 있다. 나는 그 악몽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응, 나 악몽을 꿨어. 네가 엄청 맞는 꿈이었어. 너는 울고 있었고 비명을 질렀어. 나는 되게 무서웠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진짜 악몽이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나를 보며, 꼬마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무척 졸렸다. 악몽 때문에 잠을 푹 자지 못했기 때문이려나. 지금 창밖도 무척 어두컴컴하고 말이다. 꼬마는 입을 열었다. 하암,

-아저씨, 때가 된 거 같아요.

무엇이? 그러나, 나는 묻지도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18.
요즘따라 왜이리 졸린 지 모르겠다. 이것도 후유증의 일종인가. 그냥 피로가 쌓인 걸까나. 꼬마의 표정도 요즘 그리 밝지 않아서 걱정이다. 요즘 날씨가 꽤 추워서 눈이 오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 날아다닐 줄 알았는데.

19.
-아저씨, 내가 내 이름을 알려줄까.
“비밀 이랬으면서?”
-내 이름은요, 히나타. 히나타야.

졸려서 감기던 나의 눈이 커졌다. 꼬마, 아니 히나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기억하냐는 듯이.


20.
비가 오던 날.

작은 아이가 골목길에 쓰러져 있다. 남자가 작은 아이를 밟고 또 찼다. 작은 아이는 비명을 지른다. 빗소리가 굵다. 남자는 아이를 각목으로 두들긴다. 작은 아이는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른다. 남자는 그런 아이의 입을 막을 생각도 없는 듯하다.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남자는 그 일방적인 폭력을 잠시 멈춘다. 작은 아이도 그 걸음을 들은 것은 마찬가지이고,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같은 비명을 마구 질러댄다. 남자는 그런 아이의 배를 발로 걷어찬다. 그리고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살핀다.

그리고 큰 아이가 젤 가까운 곳을 지나던 순간, 남자는 큰 아이의 허리를 걷어차 버린다. 큰 아이는 쓰러져서 바닥을 구른다.

남자는 큰 아이를 몇 번 패고는 큰 아이가 더 이상 꼼짝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꾹꾹 밟아 일어나지 말라는 무언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눈을 감기만 해봐……, 라는 유언의 말도.

큰 아이는 눈을 감고 싶었다. 꾹 감고 뜨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남자에 대한 공포가 너무나도 컸다. 아, 큰 아이는 작은 아이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눈을 뜬 채로 지켜봐야했다. 작은 아이는 처참하고 또 처참해진채로 너덜거리고 있다. 큰 아이는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 눈을 감고 싶다. 작은 아이의 눈이 더 이상 깜빡거리지 않는다. 작은 아이는 눈을 뜬 채로, 숨이 멎은 듯하다.

하하, 네가 그냥 지나치려하지 않고 신고라도 했다면, 이 아이는 죽지 않았을 텐데.

남자는 비열하게도 책임감을 큰 아이에게 모두 떠넘긴다. 큰 아이는 너무도 지쳤기에, 남자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미 옳고 그름을 파악할 능력은 상실되어버린 채다. 뜬 눈으로 죽어버린 작은 아이의 눈이 큰 아이를 바라보는 듯하다. 큰 아이는 그것이, 자신을 원망하는 눈이 아닐까 생각하고야 만다.

얘 이름이 뭔지 알려줄까?

큰 아이는 이미 모든 기력을 잃었지만, 남은 모든 기력을 다해 아주 약간,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남자는 큰 아이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한다. 큰 아이의 눈은 하염없이 앞만을 향하고 있다. 남자는 그런 큰아이를 발로 찼다. 그리고 다가와서 속삭인다.

히나타, 히나타야. 너가 죽인거야.

큰 아이는 이미 살아 있는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 듯한, 죽어버린 눈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21.
작은 아이는 어느 순간, 자신이 자유로워졌음을 안다. 온몸을 쑤시던 고통이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단 것을.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남자도 더 이상 보이지 않음을 깨달은 아이는 정말 오랜만에 기쁨에 가득 찰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 헛된 감정이라서, 아이는 자신의 몸을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몸은 너무나도 끔찍하게 망가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친다. 상황을 바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이는 너무나 어리다.

그리고 누군가가 발치에 채인다. 그 남자아이. 자신의 비명을 듣지 않고 지나쳐가려다가 엮어버린. 아이는 자신의 곁에 있는 유일한 사람을 흔든다. 그러나 반응이 없다. 주변을 둘러보니 깨어진 헤드폰이 보인다.

아, 일부러 무시한 것이 아니었어. 아이는 남자와 함께 남자아이를 원망하던 것을 후회한다. 그리고 조심스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며 말을 시작한다. 자신의 몸으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시야를 택해서.

안녕, 나는 히나타 쇼요야…

그러나 말에는, 답이 없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아이는 문득 공포에 질린다. 고개를 돌리자 아직도 그 끔찍한 모습의 자신이 그대로이다. 아이는 두려움에 가득 찬다.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아, 그리고 아이는 그 의심을 부정하려 했다.

내 목소리를 들어줘!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는다. 아무도 아이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

나를 봐줘!

그러나 아무도, 보지 않는다. 아이는 자신의 비명이 과연 울리고는 있는 것일까, 사실 아무도 듣지 않으니까, 나의 목소리란 더 이상 쓸모없지 않을까.

거기 아무도 없어?

그러나 아무도, 듣지 못한다. 아이는 공포에 질려 자신의 옆에 있는 유일한 이를 흔들고 또 흔들었다. 그리고 외친다. 내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나를 봐주세요, 일어나서 나를,

도와주세요.


22.
카게야마가 가득 공포에 찬 비명과, 모든 절망을 담은 원망과, 너무나도 간절한 외침을 들었을 때 죽어버린 히나타는 이미 카게야마의 곁을 떠나버렸지만, 그 외침은 이미 닿아버렸다.

카게야마는 그 순간부터 죽어버린 이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23.
나는 울고 있었다. 내가 잊은 것들과 기억하지 못한 것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나는 그래서, 울고 있었다.

아, 그래. 생각해보면 그렇다.

너는 너의 이름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너는 내가 비 오는 것 날을 특히 싫어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너는 단 한 번도 비 오는 날에 나가자고 한 적이 없었다.
네가 일찍 들어간 날이면 항상 내가 돌아가는 길에는 비가 왔다.
너는 너가 죽게 된 때를 말해 주지 않았다.
너는 너의 나이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죽은 나이가 언제인지 물었을 때, 너는 답지 않게 애교를 부려 상황을 무마해버렸지.
너는 내가 이따금 후유증에 시달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이 굴었다.
너는 나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날, 그저 기다리는 게 보통의 경우이었는데, 그날은 거의 죽어가는 나를 찾아왔다.
너는 내가 너의 기억을 거의 다 잊어버렸을 때에서야 나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너는 내가 어째서 자신을 볼 수 있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24.
“어째서, 말하지 않았어?”

나는 이것이 멍청한 질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당연히, 나라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듣고 싶었다. 꼬마, 아니 히나타의 입으로.

-그러면, 작별해야하니까.

히나타가 밝게 웃는다. 그 모습이 아스라하다. 나는 히나타의 손을 잡았다. 잡은 손에 힘을 준다. 히나타는 나를 살짝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다시 미소 짓는다.

-소용없어, 아저씨. 애초에 죽은 사람을 잡을 수 있다는 것부터 이상하잖아?

나는 어떤 말을 꺼내야할 줄을 몰랐다. 히나타는 미소 짓고 있는데도, 어째서인지 슬퍼보였다.

-형이라고 한번, 부르고 싶었는데.

나는 너무 꼬마다운 작별 인사에, 이것이 정말로 마지막임을 잊고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부르지 그랬어.

-그리고 히나타라고 불리고 싶었어.

그래, 히나타. 나는 미소 지었다. 히나타가 더욱 환하게 웃는다. 그 미소가 너무나도 환해서 나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히나타는 정말로, 이 빛나는 아이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어서, 나는 몇 번이고 그것을 불러주고 싶었지만, 기회는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저씨, 고마워!

햇살 같이 환하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히나타. 히나타는 점점 흩어지듯이, 옅어져갔다. 나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닿지 않는다. 히나타는 옅어지고 또 옅어져 결국 사라져버렸다. 나는 황망한 마음으로 히나타가 있던 자리로 달려갔다. 그러나 귀신이란 존재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이었는지 어떤 흔적도 기운도 느낄 수도 찾을 수도 없었다. 나는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 안았다. 계속 저주해왔던 이 ‘눈’이, 이렇게 간절해질 줄이야.

아, 히나타. 히나타. 히나타.

나는 계속 히나타를 중얼거렸다. 그 이름이 입에서 발음되는 순간순간들이 저릿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사라진 히나타를 부르던 나의 볼과 턱을 눈물이 타고 흘렀다. 그리고 눈물은 하염없이 쏟아졌다.

가엾고 또 가여운 그 아이와의 마지막이, 언제나 짓던 햇살 같은 미소였다는 것이 나는 너무나 가슴 아팠던 것이다.

아, 안녕. 히나타.


25.
그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죽은 존재를 보는 일이 없었다. 이따금 그 아이와의 시간과 그 모든 것을 봐야만 하던 십년에 가까운 시간들을 증명할 무언가도 없음을 상기하게 되는 순간일 때면, 그 모든 것들이 허상이나 꿈에서 비롯된 나의 거짓된 상상은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시간들이 환상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 햇살같이 환한, 밝은 미소는 내 머릿속에서 상상해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남은 자의 삶을 살아갔다.